사실 신앙은 '비이성적'인 면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 말은 반이성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즉, 이성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지 이성에 반대로 행동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지극히 이성적입니다. 다만 그 이성을 '신앙'의 범주 안에서 활용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십자가는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성의 범주 안에서는 십자가는 피해야 하는 대상이 맞기 때문입니다. 내가 저지르지 않은 범죄 행위에 대해서 내가 그 책임을 안는다는 것은 이성적이지 못합니다.
하지만 '신앙'이라는 범주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는 지극히 이성적인 행위가 됩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분께서 영원의 가치 안에서 우리에게 내려주시는 십자가의 고통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끌어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우리는 힌트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즉, 참된 신앙과 거짓된 신앙을 구별하는 기준점입니다. 그것은 십자가의 수용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신앙을 지닌 이라면 십자가의 내적 가치를 깨닫고 힘들지만 그 십자가를 감내하고자 애를 쓸 것이고 신앙을 지닌 흉내를 내는 사람, 즉 거짓 신앙인이라면 합리적인 세속적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 한 십자가는 피하는 것이 상책이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자녀들은 언뜻 신심있게 행동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저마다의 세속적 계산이 다 들어가 있는 행동을 할 뿐입니다. 지독히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속의 영은 거룩한 영, 즉 성령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을 두고 사고를 전개해 나가는 영원한 생명에 속한 이들의 삶은 불가해한 것일 뿐입니다.
신앙의 어른들이 버릇처럼 이야기하는 '내 보속이다'라는 삶의 태도는 이성적인 이들에게는 거슬리는 말일 뿐입니다. 내가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보속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자녀들은 세상의 어두움을 함께 끌어안고 보속하듯이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런 거룩한 보속의 삶 속에서 영원의 가치를 희망합니다. 그리고 신앙인들은 하느님의 말씀 안에 진리가 있음을 알기에 자신들이 희망하는 것을 얻으리라는 확신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신앙인은 그 누구보다도 이성적입니다. 다만 세속의 자녀들은 가지지 못한 '거룩한 이성'을 지니고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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