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진성사 특강
(성경구절 선정 및 묵상)
1일차 - 믿는다는 것
견진성사의 견진이라는 것은 굳힌다, 단단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미 지니고 있는 신앙을 더 단단하게 해서 소위 영혼이 어른이 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것을 단단히 할 것인지 잘 알아야 합니다. 빵을 만드는데 시멘트 가루를 들고 와서는 이것을 단단하게 해 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제일 먼저는 우리의 신앙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믿는다고 하는데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인지? 또 어떻게 믿는 것인지 모르는 채로 그냥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믿음이라는 말은 ‘신앙信仰’이라고도 불립니다. 신앙이라는 단어는 믿는다는 의미의 신信과 우러른다는 의미의 앙仰으로 구분해서 살필 수 있습니다. 먼저는 믿음을 살펴봅시다.
1. 서로 믿다
우리는 사실 믿음으로 구축된 사회 안에서 살아갑니다. 추석 연휴 중 토요일에 초전의 0번 버스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르신들의 편의를 위해서 이 연휴에도 운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신뢰 관계가 없으면 버스를 어떻게 이용을 할까요? 어느 시간대에 온다는 것을 믿고 나가서 타야 할텐데 그 시간에 온다고 하고선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렇다면 신뢰는 깨어지고 세상 일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돈이라는 것도 신뢰를 기초로 하는 것입니다. 얼마의 돈을 내밀면 그 가치에 해당하는 상품을 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베네수엘라나 아르헨티나처럼 그런 기초적인 신뢰가 무너진 곳에서는 오늘 지니고 있는 돈의 가치와 내일의 가치가 다르기 때문에 돈이라는 것 자체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결국 사회의 기반이 무너지는 셈입니다. 우리는 사실 이미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눈에 보이는 사회 안에서만 사용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2. 하느님을 믿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이라는 것으로 구축된 사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두번째로 배워야 하는 것은 그 신앙이 대상으로 하는 것이 단순히 현세에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것 자체가 사실 보이지 않는 대상을 바탕으로 하고 그 원래의 목적지는 현세의 보이는 영역이 아닌 셈입니다. 휴대폰은 전화를 걸기 위한 도구이지 그것을 도구삼아 못이나 박자고 있는 물건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내면의 생활과 초월적인 생활을 지향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이지 현세에 얽매이도록 만들어진 존재는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우리가 지닌 믿음을 초월적인 존재와 이루어가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믿음을 구축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나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성당을 나아오느냐 나아오지 않느냐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성당에 나아오는 것도 얼마든지 현세적인 목적으로 가능한 일이니까요. 성당도 세상 못지 않은 인맥의 장이기 때문에 나아오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과연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부정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들어높여져야 합니다. 인간이 여러가지 고차원적인 일을 하지만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한 신뢰를 내적으로 형성시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차원적인 인간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서로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보다 고차원적인 여러가지 가치들에 대한 신뢰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이라는 근본적인 가치와 그 밖에도 온유, 친절, 인내, 겸손, 선의, 호의 등과 같은 여러가지 내적 덕행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믿음을 쌓아 나가야 하고 그 원래의 주인이신 분과의 관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원래의 자리인 셈입니다.
2일차 - 삼위일체와 성령
지난 시간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이며 그 본래적 지향점이 어디인지 함께 고찰해 보았습니다. 이번에는 그 본래적 지향점이신 하느님에 관해서 조금 알아보고 그 가운데 성령이라는 분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삼위일체 하느님은 한 분이십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인간에게 세 가지 위격으로 드러나십니다. 그 중 하나의 위격은 바로 성부입니다. 성부, 즉 거룩한 아버지는 세상을 창조하신 분으로 특징지워집니다. 다른 하나는 성자입니다. 성자는 당연히 성부에게서 나신 분으로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이 되시어 우리에게 살갑게 다가오신 분이십니다. 그분을 우리는 예수님이라고 부르고 기름 부음을 받아서 성별된 분, 메시아의 소명을 지닌 분이라는 의미로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우리가 처해 있는 죄악의 현실에서 당신의 은총으로 우리를 씻으시어 정화해 주시고 구원의 길로 이끌기 위해서 가르치시고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성자는 구원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성령은 협력자, 위로자라고 불리는 분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와 함께 머무르십니다. 우리가 마음을 열고 그분을 청하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우리의 힘을 북돋아 주십니다. 이 세 위격은 한 분 하느님이십니다. 이를 어려운 말로 삼위일체라고 부릅니다. 본체로서는 한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세 위격을 지니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우리가 지닌 이해력으로 담아낼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교회는 이를 ‘신비’라고 부릅니다. 삼위일체는 학술적으로 풀어낼 대상이 아니라 비유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고 실천으로 이루어 내야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는 뜨겁게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려 보면 비유적으로 이해가 됩니다. 비록 떨어져 있지만 너무너무 사랑해서 뜻이 같은 사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삼위일체의 사랑이고 우리가 하느님과 또 이웃과 이루어야 하는 사랑의 궁극적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이고, 우리를 통해서 지금 여기서 실천되어야 하는 사랑입니다.
2. 성령 오늘은 그 가운데 성령을 좀 더 집중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령에 대해서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이라는 것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영은 과연 무엇일까요? 육체를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다볼 때에 육체를 먼저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잘 가꾸고 꾸미는 데에 열중합니다. 육에서 비롯되는 것은 육체의 욕구들입니다. 육은 흔히 더욱 쾌락적인 욕구로 빠져들곤 합니다. 그리고 그런 욕구들은 올바른 제어가 없으면 역으로 육체를 파괴하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이 육체 말고도 ‘영혼’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영은 보이지 않지만 그 활동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꺼져 있는 컴퓨터와 켜져 있는 컴퓨터 사이에 부품들의 차이는 없지만 우리는 그 둘을 잘 구분하는 것과 같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영혼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육체 속에 영혼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데 실상은 영혼이 육체를 유지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죽음이 다가오면 육은 더이상 제 기능을 유지하지 못하고 분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영혼은 영적인 영역의 영향을 받습니다. 마치 육체가 물리적인 도구에 의해서 손상을 입듯이 영혼은 영적인 작용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이 영적 작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지는데 하나는 더러운 영의 작용이고 다른 하나는 성령의 작용입니다. 성령은 간단합니다.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는 영입니다. 이 이끌어감에는 크게 두 가지 작업이 수행됩니다. 하나는 우리를 어둠에서 빛으로 돌이키는 ‘정화’의 작업입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를 하느님 더욱 가까이로 이끄는 성화의 작업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우리를 죄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시고 하느님께로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견진성사는 바로 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머무르신다는 것을 분명하고 확고한 성사의 표지로 받는 거룩한 성사입니다.
3일차 - 성령의 은사와 열매
1. 은사
성령은 우리에게 은사를 선물해 줍니다. 은사는 거룩함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소요되는 재능의 선물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카리스마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은사가 묘사된 성경 구절은 이사야서 11장 2절입니다.
그 위에 주님의 영이 머무르리니 지혜와 슬기의 영, 경륜과 용맹의 영, 지식의 영과 주님을 경외함이다. 그는 주님을 경외함으로 흐뭇해하리라. (이사 11,2-3)
은사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나누어집니다.
지혜(sabiduría), 통찰(inteligencia), 의견(prudencia), 굳셈(valentía), 지식(conocer), 공경(respetar), 경외심(temor)
지혜라는 것은 하느님의 영원하고도 거룩한 뜻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옹졸한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의 시선 안에서 사건과 인간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선을 의미합니다. 이런 지혜를 지닐 때에 어떤 사건이 일어나거나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나타나도 인간은 조급해 하지 않을 수 있고 느긋하고 여유로울 수 있습니다.
통찰, 다른 표현으로 깨달음, 영리함이라는 것은 그 지혜를 적용하는 영리함을 말합니다. 아무리 좋은 물건이 있어도 그것을 막 다루면 결과가 엉망이 되듯이 우리가 지혜를 지니고 있어도 그것을 현명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통찰이라는 것은 그런 영적인 영리함을 의미합니다.
의견이라는 것은 스페인어 해석에 따르면 '섭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하느님이 정해놓으신 여정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머물러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그때그때마다 더 나은 상황으로 보이는 요소에 쉽게 마음을 빼앗깁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이 하느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방향인지를 잘 알아서 거기에 굳건히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굳셈이라는 것은 '용기'라고도 표현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꿋꿋하게 지켜 나가는 데에는 분명 내적 힘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뜻을 지키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전쟁터에서 앞서 나가는 사람을 우리는 용기있다고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런 용기는 세상적 '무모함'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뜻 안에서 진리 안에서 참된 용기를 지닐 줄 알아야 합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영적인 여러 사정을 잘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자동차 전문가가 차의 각 부분을 잘 알아서 올바로 진단하고 수리하듯이 우리도 영적인 영역에 대한 지식을 넓혀 나가고 그것을 잘 파악해서 어디에 어떻게 문제가 생겨 있고 그것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마지막 두 부분은 하느님에 대한 같은 영역의 다른 시선을 의미합니다. 하나는 선 안에 머물러 있고 더 큰 선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보이는 하느님이고 다른 하나는 죄 안에 머물러 있는 이들입니다.
한편으로는 공경입니다. 하느님은 사랑받아야 마땅하고 드높여져야 마땅한 분입니다. 그분의 진리와 선과 사랑은 그 어느 누구도 감히 흉내내거나 심지어 상상할 수 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칭송받으셔야 마땅하고 찬미와 찬양 흠숭과 존경을 드려야 합니다.
다른 편으로 경외심입니다. 그러나 이 표현보다는 '두려움'이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스럽고 자비롭고 온유하기만 한 분이 아니라 분명 '정의'로운 분입니다. 하느님의 이런 정의 앞에 인간은 '두려움'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죄를 짓는 이들의 마음 속에는 이런 두려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겁이 나면 함부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마지막 은사는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두려움을 가질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2. 열매
성령은 아홉가지 열매를 맺도록 도와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막는 법은 없습니다.”
사랑은 하느님이 우리에게 지니신 그 사랑을 말합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것이고 뭔가를 바라고 내어주는 것이 아니지요. 기쁨은 발작적인 웃음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서 차오르는 기쁨을 말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삶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솟아나오는 기쁨이지요. 외적인 웃음은 금새 사라지지만 내면의 기쁨은 꾸준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조용함이 아니라 내면에 전혀 걸리적 거리는 것이 없음을 말합니다. 모든 일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처리하는 사람이 가진 특권적인 평화이지요. 인내는 견디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안에 있는 온갖 어리석음과 오류들 가운데에서 평화를 보존하는 좋은 방법이지요. 인내는 지금의 시대에 특별히 더욱 필요합니다. 호의는 넓은 마음, 관대함을 의미합니다. 상대의 악의가 없는 실수를 기꺼이 끌어안아주는 마음을 말하지요. 선의는 상대를 향한 선한 의도를 말합니다.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상대를 배려하고 선한 마음으로 신경써 주는 것을 말하지요. 성실은 게으르지 않은 것, 해야 할 일을 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온유는 부드러운 마음, 앙칼지거나 뾰족하지 않은 마음을 말하지요. 절제는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되 과하지 않도록 늘 마음을 다잡는 것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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