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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노인







어르신이 된다는 것을 배우는 사람은 없습니다. 특히나 현대에는 더더욱이 어르신이 되기를 적극적으로 거부하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 어른이 없습니다. 고민하는 일이 생겼을 때에 다가가서 문제를 논의하고 그 해결 방안을 의논할 어르신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두 노인을 보여줍니다. 바로 시메온과 안나입니다. 우리는 이 두 노인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어르신의 모습을 찾아내고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는 시메온입니다. 성경은 그를 '의롭고 독실하며 이스라엘이 위로받을 때를 기다리는 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의 현존을 언급합니다. 이것이 성경이 드러내는 어르신의 모습입니다. 더는 세상의 욕구에 휘둘리지 않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을 찾아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움직이는 모습입니다. 그런 가운데 의로움을 추구하고 신앙에 충실한 모습을 보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어르신의 모습은 어떠할까요? 여전히 세속성이 잔뜩 남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의로움 보다는 저마다의 끼리끼리 문화를 형성해서 다른 이들을 배척하는 것이 일상이고 탐욕스러우며 얼마 안되는 저마다의 권력에 집착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이에게 주어지는 선물은 '죽음의 순간에 대한 직감'입니다. 사실 경건하게 사는 이들은 정상적인 삶의 순리 속에서 자신의 죽음의 순간이 다가옴을 알 수 있습니다. 때로는 동물들도 자신의 죽음의 순간을 직감하면 무리에서 떨어져서 죽음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면 서서히 곡기를 끊으면서 자신의 죽음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세속성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의 죽음을 수용할 수 없고 따라서 의료 기술에 목매달아 죽은 것 같으면서도 죽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메온에게서 볼 수 있는 어른의 특징은 '영적 시야와 지혜'입니다. 시메온은 자신에게 허락된 능력 속에서 하느님의 어머니에게 자신이 바라보는 영적 지혜를 전달합니다. 그는 구세주의 운명을 알고 있었고 성모님의 고통도 알고 있었습니다. 어르신은 젊은 세대에게 이런 영적 지혜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더더욱이 오늘날에는 어르신의 부재가 느껴집니다.


두번째는 안나입니다.


당시에 '과부'라는 존재는 소외되고 외롭고 힘든 삶을 의미합니다. 이 안나는 묵묵히 그 고난의 세월을 견뎌냅니다. 그리고 그는 오로지 하느님의 대전 앞에서 하느님을 섬깁니다. 오늘날 평균적인 어르신들의 모습과 대조를 이루는 부분입니다. 여전히 적지 않은 어른들은 자신이 아직 생생하다며 나이듦을 거부하고 세상의 즐거움을 쫓아 다니고자 합니다.


안나는 또한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들을 동일한 하나의 목적으로 지향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아기에 대한 선포입니다. 수많은 말들이 오가는 오늘날입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누군가를 험담하고 비난하는 데에 사용합니다. 하지만 안나는 이런 이들을 수치스럽게 만듭니다. 안나는 자발적인 봉헌의 가치와 침묵의 가치, 그리고 뚜렷한 목적을 지닌 말의 가치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이 두 노인의 삶을 앞에 두고 우리의 삶의 지침으로 삼아 많은 것을 배워 나가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댓글

안인애님의 메시지…
마진우 요셉 신부님~^^.
너무나 감사 합니다.하느님 말씀 선포에 부지런 하시고
올바른 식견으로 깊은 영성을 삶 속에서 쉽게 풀이해 주시니
늘 감사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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