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뜬구름 잡는 소리가 아닙니다. 신앙은 체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신앙은 믿는 바를 체험하는 데에서 본질적인 힘을 지닙니다. 그래서 신앙의 체험이 없는 이는 흔히 추상적 신앙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래서 그가 지닌 신앙은 힘이 없고 약하며 더 훌륭한 ‘체계’ 앞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그래서 적지 않은 신앙인들은 세속성의 논리적 도전 앞에 무너지고 맙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신앙의 체험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오늘 요한은 우리에게 자신의 체험에 대한 확신을 전하려고 애를 씁니다. 요한에게 있어서 신앙은 ‘처음부터 있어 온 것,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인 생명의 말씀에 대한 신앙입니다.
주님을 믿는 이는 그분 안에서 이루어지는 체험들이 삶 안에 녹아 있습니다. 저의 신앙은 저의 체험을 근간으로 합니다. 믿음 안에서 나를 던져보고 그 안에서 겪게 되는 구체적인 체험들은 저를 더욱 굳건한 신앙인으로 만들어 줍니다.
체험은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같은 체험을 하더라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과 무언가를 느끼는 사람은 어떻게 나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올바른 선포를 바탕으로 합니다. 예를 들어 오늘의 이 미사를 체험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있어서 혹자의 체험은 그저 통상적인 미사일 뿐입니다. 늘 오는 미사, 늘 있는 전례, 언제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체험이 그가 지닐 수 있는 전부입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 즉 미사의 본질에 대한 선포를 경험하게 된 이에게 오늘의 미사는 구세주와의 만남이 준비되어 있는 미사이고 신앙의 열정이 있는 사제가 전달하고자 하는 보다 특별한 미사이며, 나아가 성령 기도회의 열성이 바탕이 되어 있고 심지어 치유 안수까지 준비되어 있는 미사가 됩니다. 이런 일련의 선포의 체험들은 통상적인 미사를 체험하는 이들과 질적으로 다른 체험을 선사합니다.
올바른 선포를 위해서는 겸허한 내면이 필요합니다. 똑같은 선포를 들어도 누군가의 내면은 저항합니다. 그들에게는 말씀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의지 자체가 상실되어 있습니다. 오히려 말씀 안에서 꼬투리를 잡으려는 시도를 합니다. 그들은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처럼 말씀이 뿌려지면 즉시 더러운 영에 의해 그 말씀을 빼앗겨 버리던지, 악습의 돌밭에서 말씀이 메말라 버리던지, 세속의 걱정으로 말씀이 숨막혀 버리던지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 열매 없는 삶은 신앙적 체험을 증가시키지 못합니다.
반면 좋은 밭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겸허한 내면, 오늘 화답송의 표현처럼 의인의 내면과 마음 바른 이의 내면에는 기쁨이 쏟아지고 열매가 맺힙니다. 그들은 아주 작은 은총의 체험 속에서도 많은 기쁨을 느끼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들은 사제의 작은 손길도 서투루 받는 법이 없습니다. 사제의 손길 속에서 그들은 은총을 빨아당겨 그들의 평생의 삶을 변화시키기도 합니다.
이제 이런 체험의 지식을 바탕으로 오늘 복음을 살펴보겠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주님을 너무너무 사랑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누구보다도 먼저 주님이 계셨을법한 무덤 근처에서 주님을 찾아 다닙니다. 그리고 주님의 향기만 맡더라도 주님을 알아보고 그분을 붙들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가장 먼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을 붙들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간절함이 부활하신 주님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어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등장합니다. 그들의 사랑도 강한 것이어서 그들도 예수님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하지만 사랑에서 다른 제자가 이깁니다. 믿는 이에게 사랑이라는 것은 아주 구체적인 것이어서 사랑하는 이는 힘을 지니고 있고 더 강하게 사랑하는 이는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사랑의 열정만큼 찾아다니고 발견하는 법입니다. 사랑의 열정이 없으면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집안에 성경이 도처에 널려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읽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흔히 휴대폰을, SNS를 더 사랑하곤 합니다. 시키지 않아도 찾아 다니니까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지를 살피려면 주님을 얼마나 찾는지를 살펴보면 답이 나옵니다. 좋은 음식과 값비싼 물건은 찾아다닐 줄 알면서 주님의 사랑의 자리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사랑한 두 제자는 비록 주님을 찾지는 못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주님을 찾으러 달려간 자신의 믿음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체험은 훗날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으로 완성됩니다. 그리고 그 체험 속에서 베드로는 용서의 은총도 얻고 충실한 사도가 되는 은총도 얻게 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듣지 않은 것을 찾을 수 없고 찾지 못한 것을 선포할 수 없습니다. 과연 우리에게는 신앙의 체험이 존재할까요? 아니 그 체험을 위해서 미미한 노력이나마 하고 있을까요? 신앙은 논리가 아닙니다. 신앙은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선포합니다. 여러분도 우리와 친교를 나누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교는 아버지와 또 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이 글을 씁니다.
아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