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양
우리의 죄는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그 죄를 대신 짊어질 때에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교,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바로 그분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져 주신다는 단순한 믿음 때문입니다. 인간은 스스로 죄에서 해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마다 먹는 양
사람에게는 자신에게 허락된 양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은총도 마찬가지이니 저마다 허락된 수준의 은총을 얻어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성체를 모셔도 누군가에게는 죽기 직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모시는 성체가 될 수도 있고 다른 누군가는 그냥 흘려버리는 은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은총이 온다고 모두 선물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그릇에 알맞게 주어집니다.
피와 두 문설주와 상인방
피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희생양은 죽어야 하고 오늘날의 희생양이신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세상에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피는 가로대와 세로대에 발라집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삶에 십자가를 지니고 살아야 합니다.
밤에 먹다
밤은 빛이 꺼진 시간을 말합니다. 배가 부를 때 밥을 먹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가 고플 때에 밥이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어린양은 이 은총의 빛이 꺼진 듯한 현세에서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밤이라는 시련의 시간 속에 성체라는 어린양을 먹음으로서 힘을 얻어 살아갑니다.
불, 누룩 없는 빵, 쓴나물
불은 뜨거운 열정을 의미하기도 하고, 그 열정에 상응하는 뜨거운 시련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지독한 수난을 거쳐서 가장 찬란한 영광을 입었습니다. 누룩 없는 빵은 허영이 없는 영혼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올 때에 사실 누룩을 부풀릴 시간이 없었습니다. 부풀리는 것은 여유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누룩 없는 빵은 우리의 생의 시간이 사실 얼마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저런 계획을 여전히 세우지만 하느님은 뜻하지 않은 시간에 우리의 생을 거두어 가실 것입니다. 쓴나물은 시련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신 포도주를 마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언제나 쓴나물과 같은 시련이 곁들여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쓴나물은 오히려 우리를 본래의 목적에 충실하게 합니다.
허리에 띠, 발에는 신, 손에는 지팡이
준비되어 있는 삶의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현세를 살지만 현세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깨어있는 자세, 즉 영적인 현실에 깨어있는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집트를 치다, 이스라엘이 구원받다
같은 동일한 행위의 두 가지 결과입니다. 구원의 날은 믿는 이들에게는 선물이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재앙이 됩니다. 그렇다면 그 상황을 뒤집어서 지금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물질적 축복, 명예와 권력은 믿지 않는 이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행복이지만 믿는 이들은 신중하게 이용해야 하는 대상이 됩니다.
이제 이 강론을 마무리하고 세족례가 시작됩니다. 세족례는 누군가의 발을 씻는 것이니 굴욕적인 일일까요? 아니면 영원 안에서 만나게 될 이들을 준비시키는 거룩한 행위일까요? 성당 안에서는 사실 영예로운 일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일상 안에서 서로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 가난하고 더 더럽고 더 힘들고 더 성가신 일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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