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병이 죄의 결과는 아닙니다. 하지만 죄의 결과인 병세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는 죄로 인해서 병을 얻게 된 것으로 보이는 이가 등장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이는 이 사람이 겪고 있는 나쁜 일이 그의 이전의 죄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의 꼬인 내면은 예수님과 나누는 대화에서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는 예수님의 간단한 질문에 그는 단순하게 대답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 5,37)
예수님은 그런 그의 말을 뒤로 하고 그를 고쳐줍니다. 이로써 아름다운 하나의 치유가 완료되나 싶지만 사실 일은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안식일의 철두철미한 준수에 사로잡혀 있는 이들이 몰려와 그 병이 나은 이에게 안식일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화 속에서 그에게 '들 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시킨 사람이 누구인지 묻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마치 이런 사건을 예견이라도 하셨다는 듯이 '몰래' 자리를 뜨셨고 그는 예수님이 누군지에 대해서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사실 여기서도 걸리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로 부터 큰 선물을 받게 될 때에 그 감사함에 그 사람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싶어하게 마련인데 이 사람은 38년을 누워 있다가 일어났으면서 자신을 낫게 해 준 사람에 대해서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것도 이 환자의 내면의 자기중심성을 알게 해 줍니다.
시간이 흐르고 예수님이 성전에서 그 사람을 다시 만나게 되어 충고를 해 줍니다. 그것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이미 시간이 흘러 굳이 그래야 할 필요가 없음에도 유다인들에게 돌아가 자신을 건강하게 만든 사람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서 예수님을 향한 유다인들의 박해가 시작이 됩니다.
때로 우리는 무언가 실천적으로 크게 잘못을 하거나 정해진 규정을 크게 어겨야 죄가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처럼 우리가 흘린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거룩한 일을 방해한다면 그것 역시도 큰 죄가 됩니다. 박해를 가한 것은 유다인이지만 그 일에 방아쇠를 당긴 것은 바로 서른여덟 해나 앓던 그 병자였습니다.
댓글
38년 동안 앓던 병자의 행실에 '어떻게 저럴수가..'를 다시 외치다가 문득, 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38년 보다 더 긴 시간 동안 육체적. 영적으로 '건강하게' 고쳐 주신 분의 말씀,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하고 이전의 삶과의 경계에서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울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말씀에 대한 실천 없는 공허한 말만 무심히 일삼았던 모습을 반성합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다시 용기를 주시는 주님을 찬미합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