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믿는 사람은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요한 3,18)
사람들은 심판이라는 것이 모든 일을 끝내고 결산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즉, 미사 3번에 악행 2회면 3-2=1이라는 결론이 되는 식이지요. 하지만 이는 그릇된 이해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그의 내면에서 비롯하고 우리가 가진 의도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한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의도가 하느님 앞에는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셈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외아들을 믿는다고 할 때에 믿는다는 표현은 조금은 무게감이 있습니다. 그냥 성당을 다닌다고 믿게 되는 것이나 세례를 받았다고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라는 말, 믿는다는 표현은 그 대상을 진정으로 따른다는 것을 밑바탕에 두는 표현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그 신뢰하는 대상에게 전적으로 나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겉으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실제 행동은 세상에 더 기대고 있는 사람에게 '믿음'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런 이들을 '위선자'라고 표현합니다.
그래서 이런 참된 의미의 믿음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이미 심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 믿음을 더욱 확고히 하고 구체적으로 실천해 나갈 수도록 그들은 심판이라는 것과는 상관 없게 됩니다. 그들은 심판을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상급을 얻게 됩니다. 믿음의 깊이 만큼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이 막대해지는 법입니다.
반대로 믿지 않는 이들은 이미 심판을 받은 상태를 살아가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기대는 것의 한계점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조금만 시선을 열고 살아가면 이 세상에 기대는 사람들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볼 수 있습니다. 간단합니다. 그들은 가진 것을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이고 자신의 목숨마저 잃게 될 것입니다. 그 자체가 하나의 심판이 됩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던 것을 빼앗기는 이의 마음 속에는 울분과 분노, 후회와 탄식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심판인 셈입니다. 나아가 그들이 세상에서 저지를 어둠의 행위에 따른 결과가 그들을 기다리게 됩니다.
교회는 이런 일을 미리 경고합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악하였기 때문이다.
악을 저지르는 자는 누구나 빛을 미워하고 빛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자기가 한 일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이다.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확고합니다. 사람은 저마다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는 속일 수 없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빛, 은총의 빛, 하느님의 빛을 사랑해야 합니다. 세상은 아무리 화려해도 결국 그 안에 내재된 허무를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곧 어둠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그분의 빛을 찾아 길을 나서야 합니다. 쉽지 않은 여정이겠으나 그 빛의 여정의 마지막에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행복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귀 있는 사람은 듣게 될 것입니다.
댓글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혼자 두지 않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