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하느님의 사자들을 조롱하고 그분의 말씀을 무시하였으며,
그분의 예언자들을 비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주님의 진노가 당신 백성을 향하여 타올라
구제할 길이 없게 되었다.
(2역대 36,16)
냄비에 국을 넣고 끓이면 물이 끓기 시작할때 일정 수준 이상까지는 뚜껑이 버텨줍니다. 하지만 한계점을 넘어서기 시작하면 뚜껑을 밀어올리고 국물이 넘치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의 진노도 비슷합니다. 우리의 삶의 단편들 가운데 몇몇은 하느님이 정한 임계점을 넘어서서 이루어지는 결과이기도 합니다.
한 두 번 술을 마신다고 몸이 망가지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신체의 해독 작용을 넘어서서 꾸준히 몸에 술을 부어댄다면 필히 몸은 고장나고 맙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와 비슷합니다. 한두번 원하는 게 있어 그것을 샀다고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꾸준히 탐욕이라는 영혼의 병에 시달리게 되면 훗날에는 필히 그것으로 인해서 더 큰 고통이 야기되는 법입니다.
한 인간 개인에게 일어나는 일과 비슷하게 공동체도 비슷한 운명을 겪습니다. 그 어떤 공동체라도 문제가 되는 이들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공동체 전체가 순식간에 위태로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공동체 전체가 병들어간다면 훗날에는 그 결과가 공동체를 향해서 다가오게 됩니다.
인류는 지금 우리가 꾸준히 저질러 온 자연파괴의 결과에 직면해 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여러 요인들이 작용해 인구 소멸의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회도 교구별로 본당별로 여러 각종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수많은 다양한 해결책들이 제시되지만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우리는 참된 가치를 찾고 있으며 가장 선하신 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을까요?
고통이 시작되면 사람들은 깨닫습니다. 그제서야 자신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음을 뒤늦게 이해하게 되지요. 하지만 가능하다면 그 임계점에 가 닿기 전에 되돌이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일단 고통이 시작되고 나면 겪어야만 하는 일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교회의 역할 가운데 중요한 부분은 이것입니다. 교회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헌신하기보다 문제를 사전에 예방하는 데에 더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구원이라는 문제는 이미 구원의 가부가 결정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멸망으로 다가서고 있는 이들에게 방향을 돌이키도록 알려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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