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육체의 눈은 눈 앞에 무언가를 물리적으로 두면서 가로막히게 됩니다. 그것이 눈을 멀게 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지만 다른 방법도 있습니다. 주변의 빛을 모두 꺼버려도 눈은 작용을 하지 못합니다. 빛을 감각하는 기관이니 빛이 없으면 소용없는 기관이 됩니다.
영혼에도 눈이 있습니다. 영혼은 욕구를 뿜어내고 그것이 가 닿는 것을 감각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선에 영향을 받을 때에는 선을 바라보게 되고 악에 영향을 받을 때에는 선에 눈이 멀어 버리게 됩니다.
순진한 아이는 엄마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엄마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갖고 엄마의 냄새와 엄마의 발자국 소리도 압니다. 하지만 아이가 무언가 잘못을 저지르게 되면 그렇게나 좋아하던 엄마가 다가오는 것을 싫어하고 꺼려하게 됩니다. 가끔 아이들이 똥을 싸면 그 전까지 활발하던 움직임을 멈추고 무언가 얼어붙어 있는 모양새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당황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대로 굳어 버리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죄를 저지른 영혼은 선에 대해서 눈멀게 되고 선이 다가오는 것을 거부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라는 것이 영혼의 눈을 막는 하나의 방식입니다.
성당을 나오지 않는다고 세속적으로 무슨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편할 수도 있습니다. 주일의 귀한 시간을 미사를 나오지 않고 홀로 유용하게 쓸 수 있을테니 세속적으로는 더 즐거운 시간이 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문제는 영혼에서 발생합니다. 우리가 성체성사에서 멀어질 때에 영혼의 빛이 꺼져가게 되고 결국 어둠에 물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억지로 보는 고해 성사라도 성사 가까이 머물러 있으면 얻을 수 있는 은총의 기회를 멀리할 때에 영혼은 점점 더 어둠에 물들어가게 되고 전에는 생각지 않았던 어둠의 행실들을 쉽게 저지르게 됩니다. 이것이 영혼의 빛을 꺼뜨려서 영혼을 눈멀게 하는 또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들이 틀렸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지혜 2,21-22)
영혼의 눈을 뜨고 바라보는 사람은 하느님의 지혜의 힘을 빌어 바라보기에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반면 영혼의 눈이 감긴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언가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나를 알고 또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내가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셨기 때문이다.”(요한 7,28-29)
댓글
하느님을 기억하지 않고, 나의 뜻을 최우선으로 살아갈때 어김 없이 그랬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볼수도 없는 짙은 어둠 속에서, 오만과 교만이라는 허름한 지팡이에 의지하며 길을 찾아보려 했지만 언제나 그 자리에서 맴돌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멀리서 비춰오는 한줄기 빛을 발견 하고는 기뻐합니다.
하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밝은 빛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눈이 부셔 아파합니다.
익숙해진 어둠으로 다시 돌아 갈것인지 아니면, 감내해야 하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이제는 밝은 빛 속에서 살것인지를 선뜻 결정하지 못하는 모습에도 계속 빛을 비추시며 인내로이 기다려주셨습니다.
눈을 뜨게 해주신 성경 속의 그 수많은 소경들 속에서 내모습을 봅니다.
죄와 어둠으로 다시 앞을 가리려 할때 마다 말씀해주십니다.
'너는 기억하지 못하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