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이 위험한 행동을 하는 걸 자랑한다고 그 영향력이 크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자기 주변의 친구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말겠지요.
하지만 유명 연예인이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을 한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그를 동경하는 수많은 이들이 그런 그를 무턱대고 따라하려고 할 것이고 실제로 그런 엉뚱한 행동들은 소위 무슨 무슨 챌린지 형태로 확산되기도 합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모여서 누군가를 험담하는 것은 그 영향력이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지도자가 그릇된 모습을 보인다면 그 영향력은 클 수 밖에 없습니다.
과거에는 어르신들은 '삶의 지혜'를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향력이 대단했고 오늘 독서에 나오는 엘아자르라는 율법학자와 같이 자신의 소소한 행동에 책임을 져서 차라리 매를 맞고 죽는 결단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어르신들이 가지고 있던 그 영역에서 스스로를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젊은이들 사이에서 그릇된 표양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더럽히기까지 합니다. 공공기관에 와서 나이 많은 것으로 고함을 질러 댄다거나 자신에게 조금만 섭섭한 것이 생겨나도 가만히 있지 않는 모습들이 흔하게 발견되면서 이제는 그 누구도 어르신들에게 '지혜'를 찾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능하면 피하고 멀리하고 싶어할 뿐입니다.
두 종류의 어르신이 있으니 그저 나이만 더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한 편, 삶의 지혜를 더해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삶의 지혜는 오랜 숙고와 인내, 겸손과 온유, 무엇보다도 참된 믿음과 하느님을 향한 사랑에서 비롯합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의 삶을 바라보면서 같은 오류를 반복하지 않으려 하고 나아가 하느님으로부터 진정한 지혜와 은총 속에서 살아가려는 열망을 키워간다면 우리는 지혜로운 어른이 될 수 있습니다.
찬란히 빛나는 보석이 굳이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않아도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처럼, 노년의 지혜도 그것을 알아보는 이에게 빛나는 보석과 같은 위치에 있습니다. 찬란한 보석이 오랜 연마를 통해서 완성되듯이, 고결한 삶도 오랜 시련을 통해서 완성되어 갑니다.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바로 형틀로 갔다. (2마카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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