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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믿음이라는 것은 어떻게 형성될까요? 그것은 말과 그 말의 실행으로 증명됩니다. 믿음이 있기 위해서는 먼저 '약속'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약속을 실행하는 것을 통해서 믿음은 증명됩니다. 하지만 이렇게만 단순한 구도로만 믿음이 형성되는 것이라면 사기꾼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말하고 약속을 지키는 듯한 인상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을 단기간 하고 난 뒤에는 커다란 속임수가 존재합니다. 결국 그들은 큰 것을 숨기기 위해서 작은 것을 내어주는 셈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참된 것이려면 '꾸준함'과 '성실함'이 필요합니다. 비근한 예로 어느 본당이든 터줏대감 행세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본당을 너무나 사랑하며 본당을 위해서 많은 것을 할 것 처럼 이야기하면서 스스로 집주인 행세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그 공허한 말은 머지 않아 입증되고 맙니다. 아주 작은 성가심에도 그들은 자신의 직분을 내던지고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도망가 버리고 맙니다. 그들의 말이 그들의 행실로 증명된 셈입니다. 그들의 말은 공허한 것이었고 그들은 본당도 신자들도 사랑하는 이들이 아니었음이 그들의 실천으로 입증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예수님을 꾸준히 지켜봐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삶의 진솔함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비록 성경에 예수님의 소년 시절은 나와있지 않지만 예수님은 성실하고 선하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친절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스승이 되어 돌아온 고향에서 예수님은 못마땅하게 여겨집니다. 소위 못믿을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배척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님은 그곳에서 몇몇 병자를 제외하고는 아무 기적도 행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구절이 등장을 합니다. 바로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는 구절입니다.


예수님의 놀람은 일반 사람들의 놀람과는 차원을 달리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휴대폰의 새로운 기능을 보면 놀랍니다. 우리의 예상 범주가 좁은데 그것을 벗어나는 기능을 보게 되면 놀라게 됩니다. 하지만 엔지니어는 놀랄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휴대폰 안의 기능이 그렇게 구현되리라는 것은 엔지니어로서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범주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외아들로서 영혼의 주인이신 분이십니다. 쉽게 말해 영혼의 엔지니어입니다. 그런 그분이 고향 마을에 복음을 선포하러 가셨는데 사람들의 반응에 놀라는 이유는, 지금까지 그분과 또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그 마을에 함께 살면서 꾸준히 영향을 미치고 삶의 모범으로 가르침을 전했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들의 반응이 영혼의 엔지니어의 예상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마치 이맘때면 참외가 주먹만한 크기로 익어 있어야 하는데 참외가 크기는 커녕 모종들이 뿌리부터 썩어 누렇게 변해 있는 것을 바라보고 놀라는 농부와 비슷한 셈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분은 그들에게 매달려 믿음을 가져 달라고 사정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때부터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침을 시작합니다. 세상은 넓고 복음을 받아들일 이들은 많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무려 수십년을 함께 한 사람들이 그분을 배척한다고 실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분에게는 앞으로의 길이 열려 있었고 그분을 갈망하는 곳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복음 환호송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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