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유혹




먼저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유치원생이 가야 할 길이 있고 대학원생이 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유혹의 여정을 듣고 배우기는 하되 우리에게 같은 유혹이 오리라고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아마 악마가 오기도 전에 우리 스스로 악마에게 길을 터주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온 첫 번째 유혹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를 위해서 신앙인의 존엄을 버릴 것인가를 유혹하는 데 있었습니다.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녀들로서의 존엄을 버릴 정도로 세상을 추구할 것인가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날은 그저 아주 작은 세상의 기회에도 신앙의 여정을 쉽게 내던져 버리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누가 주말에 여행 가자고 하면 주일미사를 우습게 여기고, 그 밖의 여러 기회에서도 신앙의 고귀한 것들을 헌신짝처럼 여기는 이들을 만나는 것은 이제는 아주 쉬운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다가온 두 번째 유혹은 권세와 영광이었습니다. 사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일상의 삶을 우선할 때가 있습니다. 빚을 내면서도 정치권에 도전하고 명예가 실추된다고 생각할 때에는 일상을 던져두고 자존심 싸움을 하는 이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인간 내면에 형성되는 이 권세와 영광에 대한 욕구는 생존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마저 앞질러 버리는 것입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세상 안에서 정당한 권세를 얻고 정당한 영광을 누리는 것 자체가 죄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을 얻기 위해서 악마, 즉 거짓된 영에게 우리의 영의 존엄을 내어바치는 행위를 할 때에 문제가 됩니다. 학교에서 성실히 일해온 학교 선생님이 존경을 받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고 마땅히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속여 부당하게 다른 이의 영광을 자신이 쥐는 것이라면 옳지 않습니다. 악마는 예수님에게 그 제안을 하는 것이고 예수님은 성경 말씀으로 이를 극복합니다.


이 두 번의 유혹에 실패한 악마는 마지막 유혹, 즉 스스로를 신뢰하는 유혹을 던집니다. 태초에 아담과 이브가 겪었던 교만의 유혹, 스스로 하느님이 되는 유혹을 던졌습니다. 사람은 결국 최종적인 영역에서 스스로가 추구하는 것을 하고 싶어합니다. 하느님에게 순명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스스로가 온 세상의 구심점이 되고 중심이 되고 싶어합니다. 악마는 자신이 겪고 빠져든 궁극의 유혹을 내던졌고 예수님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로 이를 이겨냅니다.


유혹은 끝난 게 아닙니다. 그저 이번에 멈추었을 뿐입니다. 유혹은 예수님의 생애 내내 반복되었고 이제 예수님은 부활하셨으니 그 유혹은 예수님의 지체들을 향해서 내려왔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유혹의 어쩌면 가장 낮은 단계에서조차도 너무나 쉽게 쓰러지고 일어나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친숙해 져야 하고 인내와 끈기를 길러야 합니다. 유혹은 우리의 생애 내내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