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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 사도의 열정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야고 4,2-4)

야고보 사도의 이런 구절을 들으면 사람들의 반응은 저마다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건 같은 말씀을 바라보는 방향의 차이에서 기인합니다.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은 이미 선하게 살고 있는 이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악함에 시달리는 이들에게는 기쁨으로 와 닿는 말이겠지만 반대로 자신의 삶이 악으로 기우는 이들, 세상의 유혹들에 자신을 맡기고 있는 이들에게는 거슬림으로 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의 조금은 강한 듯한 표현들은 듣는 이에 따라서 저마다 다르게 와 닿게 마련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바오로 사도 못지 않게 열정이 대단한 사도였습니다. 그의 열정은 복음서 어디에 특별히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야고보 사도가 저술한 편지글 안에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야고보 사도는 영혼들을 구하겠노라는 열정에 가득한 사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바를 끊임없이 가르치고 또 가르칩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들은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명백하고 뚜렷합니다. 우리가 얻지 못하는 이유, 청해도 얻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가감없이 솔직히 우리에게 그 이유를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그 가장 근본에 올바로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왔다리 갔다리를 반복하며 어정쩡하게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을 언급합니다.

모르긴 해도 사람들은 끊임없이 안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보면 대충 이렇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표현은 좋은데 사실 그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살아보면 어쩔 수 없이 세상과 엮일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서 우리의 교만이 드러납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좋은 것을 주시려 해 보았자 그것은 ‘불가능’한 것을 하느님이 요구하시는 것이고 평균치 이상의 내적 능력을 지닌 이들에게 ‘만’ 해당하는 일을 하느님이 모든 이에게 요구하시는 것이라고 지레짐작 하는 것이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는 가능하고 누구에게는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에게 가능한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그 지혜를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시어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킬 수 있도록 하십니다.

우리는 일단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여기서 세상은 우리를 하느님에게 떼어놓는 세상을 말합니다. 무턱대고 모든 일을 끊고 수도원에 들어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분별력을 최대한 발휘해야 하고 부족한 능력을 하느님께 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은총’이 필요합니다.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일을 시작할 것이고 투덜대기만 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투덜대기만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가진 자는 더 많이 받아 넘치게 되고 가진 것이 없는 이는 가진 것마저 빼앗기고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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