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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임

가톨릭 교회는 오직 하나의 피임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자연주기법이라는 것이지요. 여성의 생리 주기에 따라서 임신할 가능성이 없는 날짜에 관계를 하라는 것입니다. 이 방법으로 여성의 주기를 고려하여 존중받을 수 있고 남성도 인내력을 기를 수 있으며 관계가 더욱 소중해지고 아름다워지게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 밖의 모든 피임법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은 전혀 다릅니다. 젊은이들은 일찍부터 관계를 즐기면서 이미 나름의 피임방법을 실행하고 있고, 부부사이도 마찬가지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임신을 막으면서도 서로간의 성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세상이 제안하는 나름 안전한 피임법을 이미 사용하고 있지요. 교회가 제안하는 피임법을 지키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취급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가 가르치는 성윤리는 참으로 현실과 동떨어져 보입니다. 사실 교회의 성윤리를 배울 기회도 별로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그냥 성이라는 것은 모두가 쉬쉬하고 살 뿐이지요. 아무도 ‘성’을 교회에서 배우지 않습니다. 학교에서 이미 다 아는 성적 지식을 배우거나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배우거나 인터넷으로 배우거나 서로 간에 정보를 주고 받거나 하면서 배우지요.

교회가 가르치는 성과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가르침은 굉장히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어디에 중점을 두고 사람들에게 성을 가르쳐야 할지에 대해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피임과 같은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결정은 성생활의 결정권이 있는 성인 남녀들이 스스로 결정하도록 맡기고 교회는 교회가 걱정하는 것을 솔직히 밝히는 것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이 조금은 민감하게 취급되는 이유는 ‘자녀출산’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녀의 탄생은 단순히 인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로 새로운 생명을 선물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릇된 선택으로 인한 자녀의 탄생은 더욱 그릇된 선택으로 사람들을 이끌어 가기도 합니다. 바로 ‘낙태’가 그것이지요. 성을 즐기고는 싶었는데 임신은 원치 않으니 ‘낙태’를 고려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하느님 앞에 더 위중한 죄를 범하는 것이지요.

여러가지 피임법들에 대해서 교회가 걱정하는 바는 인격적인 돌봄 없이 지나치게 쾌락으로만 성을 이용함으로 인해 부부사이에 고유하게 유보된 그 본래적인 성의 아름다움이 무너지는 것 때문이며, 또한 무책임한 관계로 인해서 파생될 수 있는 낙태와 같은 더 위중한 죄 때문입니다. 무엇이든 과하면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듭니다. 무엇이든지 절제하지 않으면 파괴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교회는 피임에 관해서 거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구체적인 방법을 가르치기보다 차라리 젊은이들과 부부에게 ‘책임성’과 ‘생명의 소중함’, 그리고 구체적인 남녀간의 ’사랑’을 가르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부모들이 성관계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성은 하느님의 창조 계획 속에 들어있는 것이며 아름답고 소중한 것입니다. 모쪼록 하느님이 보시니 좋았다 할 수 있도록 아름답게 성을 누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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