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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도성

그 천사는 성령께 사로잡힌 나를 크고 높은 산 위로 데리고 가서는,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보여 주었습니다.(묵시 21,10)

묵시록의 어린양의 신부,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장차 교회가 얻게 될 거룩한 모습을 대변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가톨릭 교회 자체가 거룩한 도성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참된 교회가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교회는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중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빛나는 보석으로 가득하고 열두 초석으로 세워져 있고 열두 성문이 있으며 그 성문을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습니다. 빛나는 보석은 교회의 구성원들의 값진 덕을 의미하고 초석은 신앙의 기초를 성문은 신앙에로의 자비와 사랑의 초대를 그리고 성문을 지키는 천사는 믿음을 분별하는 정의로움을 상징합니다.

그 보석이 실제 보석보다 훨씬 더 찬란할 것이며 아름다울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이 따스한 사람을 만날 때에 느끼는 좋은 마음, 푸근한 마음처럼 훗날 우리가 들어가게 될 거룩한 도성은 영적인 아름다움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이 도성의 구성원일까요? 아니면 가라지일 뿐일까요? 가라지도 저 나름의 존재의 목적이 있습니다. 더러운 양잿물로 청소를 하듯이 좋은 것을 빛나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시련거리가 필요한 셈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훗날의 교회의 반영일 뿐입니다. 거울로 사물을 바라보면 그 안에 든 것들이 진실이 아니고 다만 상을 드러낼 뿐인 것처럼 지금의 교회도 천상의 교회를 비추는 거울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에는 그 거룩한 도성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고, 반대로 믿음의 예복을 갖추지 않아 성문을 지키는 천사들에게 쫓겨나서 어두운 곳에 두 손과 두 발이 묶여서 한탄을 하는 부류도 존재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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