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사랑의 순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태 22,37-39)

두 계명이 동등한 것이 아닙니다. 우선 순위가 분명히 존재합니다. 먼저는 ‘하느님’입니다. 그리고나서 이웃사랑이 뒤따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휴머니즘’과 ‘신앙’을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분명히 아름다운 일이지만 하느님 사랑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미묘한 문제는 여러가지 오해를 불러 일으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지요.

하느님을 먼저 사랑한다는 것이 인간을 내팽개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사랑하되 하느님의 뜻 안에서 사랑하라는 것이지요. 하나의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선교사로 처음 선교지에 도착하면 눈에 사람들이 밟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끌어 안으려고 애써 노력을 하지요. 하지만 이때 오직 ‘인간적인 방법’으로만 그들을 끌어안으려고 애쓰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들에게 필요한 재정적 지원을 해주고 그들의 인간적 삶만을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그것도 부유한 나라에서 온 ‘선교사’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그런 활동은 언뜻 아름다워보이고 좋아 보이지만 여러가지 실질적인 면을 내포하고 있고 영적으로도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나라의 선교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무조건 ‘물질적인 지원’이라는 아주 단순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의 선교는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를 간과한 채로 쏟아붓는 물질적 지원은 사람들을 하느님에게서 더 동떨어지게 만들고 때로는 예전보다 더욱 탐욕스럽고 이기적으로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차라리 물질적 지원이 없었으면 욕심이나 내지 않았을 것을 돈을 쏟아붓고 나니까 사람들이 더욱 추악하게 변해 버리는 것이지요.

선교사는 사람들을 사랑하기에 앞서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뜻을 사람들에게 펼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그들의 물질적 궁핍만을 바라보면 방향이 전혀 엉뚱한 데로 엇나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필요한 것은 수많은 돈이 아닙니다. 수많은 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세상의 갑부들은 아무런 걱정 없이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반대이지요. 돈을 많이 가졌다고 해서 걱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오직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자신의 삶을 정돈하고 꾸려나갈 때에 비로소 참된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심는 작업이 이루어지고나면 비로소 그 사람들은 ‘나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도 마찬가지 상황이 주어집니다. 나 자신처럼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조건 내가 쓰는 자동차를 그들이 쓰게 하고, 내가 사는 집처럼 그들의 집을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나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적 차원의 해석만을 요구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채워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을 먼저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인간을 위해서 최대한의 노력을 하면서도 전혀 엉뚱한 형태의 인간사랑에 집착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방향성 없는 사랑은 결국 자신의 고집스런 생각에서 유래되는 사랑일 뿐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