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에서 등장하는 주인은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의 면모에서는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면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주인이 효율성을 따졌을 것 같으면 종들이 생각하는 방식으로 일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후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세상적인 계산에 몰두하는 약삭빠른 일꾼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효율성을 바탕으로 투덜거립니다.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마태 20,11-12)
주인은 실리를 꾀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인의 의도는 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게 일거리를 주고 그에 상응하는 상급을 선물해서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 즉 은총을 나누어 주고자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원래 그리스도교 신앙은 바로 이것이 주된 목적이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늦게나마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초대하는 것, 그것이 교회의 선교 사명이고 복음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의 선물을 가능한 더 많이 나누어 주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은 후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 20,14-15)
하지만 이 본질적 사명이 어느 순간에서부터 ‘효율성’을 겨루는 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신자의 수를 보유하고 재정 규모가 큰 본당이 일종의 ‘좋은 본당’이 되고 한 사제가 성실하게 복음을 펼치지만 그 규모가 작고 보잘 것 없는 본당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본당이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잘 알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기’(복음환호송) 때문입니다.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일을 하는 이는 그에 합당한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 안에서 실리를 바라는 이들, 권력에 탐닉하는 이들은 1독서의 말씀처럼 가시나무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다가오게 될 때에 세상 안에서의 첫째와 꼴찌의 자리가 서로 뒤바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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