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기도회 교재에서 '신령한 언어'를 마치 만병 통치약인듯이 다루어 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더 좋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감추고 덜 좋은 것을 내어 놓는다면 거기에는 뭔가 의도적인 것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1코린 14장에서 분명히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여러분이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보다는 예언할 수 있기를 더 바랍니다. 누가 해석을 해 주어 교회가 성장에 도움을 받는 경우가 아니면, 예언하는 이가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보다 더 훌륭합니다." (1코린 14,5)
하지만 교재에서는 바로 첫번째 부분만 떼어내어 소개를 함으로써 바오로 사도의 의지가 우리가 모두 신령한 언어로 말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물론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를 막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은사를 두고서 다른 은사를 강조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분명히 언급합니다.
"누가 신령한 언어로 말할 때에는 한 번에 둘이나 많아야 셋이서 차례로 하고, 또 한 사람이 해석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해석하는 이가 없으면, 그들은 교회 안에서 잠자코 혼자서 하느님께만 말해야 합니다." (1코린 14,27-28)
이처럼 신령한 언어는 조심스럽게 집행되어야 하는 '개인적인 성장'을 위한 은사입니다.
"신령한 언어로 말하는 이는 자기를 성장하게 하지만, 예언하는 이는 교회를 성장하게 합니다." (1코린 14,4)
신령한 언어에 대해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첫째 서간 14장에서 잘 다루고 있습니다. 꼭 한 번 읽어 보시기를 적극 추천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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