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옷이 염료로 인해서 물이 들 듯이 인간의 영혼도 ‘사상’으로 인해서 물이 듭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런 저런 교육을 받고 그에 합당한 물이 들어가는 것이지요. 아름다운 색으로 옷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염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옷감을 상하게 만들고 더럽히는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색을 분별하고 더러운 것을 피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분별하게 받아들인 생각과 사상은 우리 영혼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예로부터 ‘이교 사상’에 대적해 와야 했습니다. 그런 생각들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적인 가르침과 진리를 흐리게 만들고 사람들을 엇나가게 만들기 일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참된 진리는 언제나 사람을 새롭게 만들고 영원을 희망하면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사랑을 하게 도와줍니다. 하지만 이교 사상들은 그런 사람들을 절망하게 하고 광신이나 맹신에 빠져들게 만들곤 했습니다.
성경 안에는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말하듯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알아 들을 수 없는 진리도 존재하는 법입니다. 문자라는 것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이의 삶과 사랑으로 구체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것을 ‘교도권’이라고 부르고 교회 공동체의 삶과 그렇게 형성되어 온 여러 가지 전승을 합쳐서 ‘성전(聖傳)’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다가올 때마다 사상의 공격은 형태를 달리하면서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바로 지금 현재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고스란히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특히나 이 인터넷이라는 수단으로 온갖 정보가 난무하는 가운데 우리는 엉뚱한 사상에 물들기가 너무나 쉬운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변한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사상’으로 전해지지 않고 구체적인 삶의 실천으로 전해지기에 그 진리는 퇴색되지 않습니다. 사랑하라고 백번을 가르치는 것보다 한 번의 구체적인 사랑 실천이 더 힘을 지닙니다. 그래서 사상적인 공격에는 묵묵한 실천으로 응대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닌 진리는 우리를 삶으로 이끌어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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