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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코로나를 대비하는 교회의 역할




교회는 기본적으로 '만남'을 바탕으로 모든 것이 구성되어 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는 말씀처럼 우리는 말씀을 직접적인 현장에서 삶으로 들려 주어야 하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신앙의 빛과 짠 맛을 느끼는 사람들이 신앙으로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코로나가 다가왔다. 근본적으로 무작위적인 사람의 접촉을 가능하면 피해야 하는 시기가 도래했다. 여행이 금지되고 사회적인 거리두기가 보편화 되고 있다. 바이러스는 눈에 보이는 게 아니라서 어디서 어떻게 전파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피치 못한 선택이 이어지고 있다. 결국 이전에 풍성하던 수많은 '만남'의 자리가 사라지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만남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전혀 색다른 신앙 전파의 구체적인 방식을 모색할 것인가?

사실 만남이라는 것을 올바로 살펴본다면 그 안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는 심지어 가족들마저 서로 올바로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들 서로 간에도 별다른 대화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우리는 바쁘게 살아왔고 그것을 당연시 여겨왔다. 집은 숙박하는 곳으로서의 기능 외에는 많은 기능을 상실해 오고 있었다.

코로나는 인간에게 자연을 되돌려주고 있다. 그리고 영적으로는 인간에게 '가정'을 회복시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교회의 앞으로의 키워드는 '가정 안에서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신앙감이 남아 있는 이들을 잘 먹여 충분히 신앙의 기쁨을 회복시켜 줌으로써 그들이 저마다 몸담고 있는 가정과 사회 안에서 신앙인으로서 참된 빛과 소금이 되도록 발판을 마련해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느 특정 집단에게 미루어져야 할 과업이 아니다. 이는 교회가 지금 사태의 심각성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는 심정으로 함께 추진해 가야 할 문제이다. 지금껏 교회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사람들 속에서 '안주'해 왔고 상투적인 신앙 표현에 길들여져 왔다. 신자들의 실제적인 문제에 단순히 '기도하라, 성경을 읽으라'는 식의 누구나 할 수 있는 대답을 반복해 왔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교회 구성원 전체가 특히 교계 제도의 지도자에서부터 모범을 보여야 할 시기가 왔다. 앉아서 마냥 기다리는 교회가 아니라 헌신하는 교회로 봉사하는 교회로 나서야 한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찾고 그 역량을 파악하고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신앙의 빛을 꺼뜨리지 않도록 기름을 준비한 처녀들과 같은 심정으로 늘 깨어 살아가야 한다.

만연해 있던 어둠의 요소들을 치워 버릴 때가 왔다. 여행과 친교의 자리가 줄어들면서 그 동안 교회 구성원들이 적잖이 치중해 왔던 소비적인 행사 들이 자연스레 줄어 들게 될 것이고 이에 따라서 교회는 복음화를 위한 최소한의 것을 남겨두고 몸뚱아리를 간소하게 만드는 데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가뜩이나 힘든 신자들의 주머니에서 지나친 '교회행사비용'을 가져올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부담을 덜고 함께 허리띠를 졸라 매기도 해야 할 것이다.

지나치게 행해져 오던 공공연한 술자리는 절로 줄어들게 될 것이고 이 참에 이런 문화 자체가 바뀌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과거에는 심지어 '술사목'이라는 말로까지 정당화 되어 오던 교회의 지나친 친교의 술자리가 앞으로는 위험스럽고 수치스런 자리로 인식되고 절제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소규모의 거룩한 만남의 자리로 바뀌어 나가야 할 것이다.

평신도들의 조심스러움은 '미사'의 생명력을 되살리고 있다. 순명에 기초해서 방역 수칙을 그 어느 공동체 보다도 충실히 지키고 있는 우리 천주교 신앙인들은 이 힘든 시기에도 미사의 자리를 되돌려 놓고 있고 따라서 사제들은 다시 얻게 된 이 소중한 '복음 선포'의 기회를 잘 가꾸어 나가야 한다. 어느 때보다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참된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과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을 올바로 선포해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가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가정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교리교육으로 전환하기 위해서 지금의 시기보다 최적의 시기는 없을 것 같다. 성당에 아이들을 모아서 가르치던 시기에서 이제는 각 가정에서 부모님들이 일상의 생활 속에서 신앙을 전할 수 있도록 교구는 필요한 신앙적 자료들을 개발하고 무상으로 나눌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신앙은 결국 어른들에게서 생활화된 신앙이기에 장기적으로 어른들의 신앙을 올바로 회복할 수 있는 복음화 프로젝트를 개발해야 할 것이다.

각 가정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신앙의 모범을 통해서 자연스러운 신앙 생활 습관을 기르는 데 주력해야 한다. 여력이 된다면 주말의 시간을 할애해서 함께 교리를 공부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이지만 무엇보다도 신앙이라는 것은 '습관'에 가까운 것이고 '문화'에 가까운 것이라서 굉장히 자연스럽게 어른들이 하는 행동을 아이들은 흉내내게 된다. 욕을 하는 어른과 함께 사는 아이는 욕을 하게 될 것이고 기도하는 어른과 함께 사는 아이는 기도에 대한 열망을 키우게 될 것이다.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주제이다. 아이들은 결국 어른들의 거울일 뿐이다.

예비신자를 대상으로 하는 신앙의 전파에 있어서 경쟁적인 시스템은 사라져야 한다. 몇 개월이 걸리든 혹은 몇 년이 걸리든 우리 일상의 영역 속에서 주변의 내면이 튼실한 사람을 분별하고 그를 이끌어 올 수 있는 장기적인 복음화 전략이 필요하다. 비대면 접촉이 활성화되는 시대라도 이미 기존에 존재하는 관계망이 쉽게 파괴되지는 않을 것이고 우리는 이미 존재하는 관계 속에서 아직 신앙의 빛을 누리지 못한 이들이 내가 가지고 있는 참된 신앙의 빛을 향해서 다가올 수 있도록 서서히 노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그런 이들이 신앙의 기초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적절한 수단(온라인 예비자 교리 등)을 강구하고 열어 두어야 한다. 성당으로 데리고 와서 어떻게든 강의식 교육을 진행해야 한다는 개념은 앞으로는 쉽지 않을 것이고 본당 신자가 보증하는 형식으로 해서 그가 편안하게 교리를 시청하고 그것을 보증받는 방식으로 교리 방식이 바뀌어 가야 할 것이며 선발 예식이나 최종 입교 예식 정도만 최대한의 예방 수칙을 지켜서 조심스럽게 성당 내에서 진행할 수 있도록 변해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여러가지 함께 생각하고 바꾸어 나가야 할 교회의 현안들이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모쪼록 교회가 한 마음으로 지금의 위기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식별해 내고 그 길을 함께 걸어나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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