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이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이들을 미워하였습니다." (요한 17,14)
우리 교회는 오랜 기간을 이단과 싸워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주된 방법은 철학을 근본으로 한 '논쟁'이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그 부분을 혼신의 힘을 다해서 보완해 왔고 그 결과 어마어마한 양의 '서적'들을 얻게 되었고 아직도 연구가 진행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책 속에 갇힐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말씀은 구체화되고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생히 살아 숨쉬는 말씀이 바로 '진리'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은 살아있는 진리이시고 우리는 그 진리를 구체적으로 만나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눈 앞에서 숨쉬고 살아있는 진리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고 그래서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고 반문합니다. 사형을 당할 아무런 탓도 없는 예수님을 풀어주는 것이 진리였지만 빌라도는 그 진리를 마주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권력에 대한 유혹이 너무나도 강했고 그것이 진리를 실천하는 것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뚜렷한 방향을 지닙니다. 그것은 선이고 사랑이며 부르심에 대한 분명한 응답입니다. 그분의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신앙을 연구하고 학위를 따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그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얼마든지 누릴 수 있는 많은 것을 희생하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라는 영역은 바로 이 분명한 방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누려야 할 그들의 안락을 포기하도록 초대하고 하기 싫은 일을 하도록 이끌어 가기 때문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예수님을 광야로 이끌었고 수많은 성인들을 박해의 현장으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이제 곧 다가오실 진리의 영이신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이 이끄시는 방향으로 데리고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향은 거의 대부분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선포자는 세상에서 환영받지 못합니다. 주일날 성당에 가기 싫어하는 남편을 이끌려는 아내는 늘 그 투덜거림을 감수해야 하고, 중독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해 내려는 시도는 항상 그 중독된 이들의 반발을 사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세상에 시달리는 이들을 '데려가고자'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빌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데려갈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그 어둠 속에서도 잘 견뎌내어 더 큰 상급을 받을 수 있도록 열매맺는 가지를 돌보아 주십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요한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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