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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보이는가?




우리의 눈은 삶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죽음을 바라보기에는 죽음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삶만 바라봅니다. 그리고 살기 위해 애를 씁니다. 사는 데에 소용되는 것들이 우선적으로 눈에 들어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삶은 죽음과 함께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균형이 잡힙니다. 죽음을 앞에 둔 삶은 허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애써 모으고 쌓아도 죽음이라는 것이 다가오면 오히려 더 큰 좌절로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삶은 죽음과 함께 바라 보아야 합니다.


나아가 삶은 '영원한 삶'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죽음 이후에 비로소 진정한 삶의 자리가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영원한 삶을 앞당겨 살아 나가야 합니다. 거기에 진정한 봉사가 있습니다.


이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면, 비로소 그들의 삶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1) 죽음에서 도망가는 삶이 보입니다. 그들은 가능한 현세에 매여 살면서 여기에서 주어지는 수많은 쾌락들을 한껏 누리려 듭니다. 가진 것을 자랑하고 가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하며 죽음은 자신에게서 머나먼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이는 나이와 상관 없습니다. 철들지 않은 삶입니다.


2) 죽음을 묵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삶에 그리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뿐입니다. 이들은 허무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더이상 나아갈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에 집착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달리 할 일도 없습니다. 그저 하루 하루 버텨 나갈 뿐입니다.


3) 영원을 앞당겨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상의 삶의 가치를 소중히 여깁니다. 그리고 영원을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은 뚜렷한 목적이 있으며 현세를 가장 소중한 목적을 위해서 기꺼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성숙한 삶입니다.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빵이나 챙기는 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데에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바리사이들은 누룩이 잔뜩 끼인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삶을 한껏 부풀려서 그 삶을 자랑하며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누룩을 조심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서도 자신들의 빵을 걱정했습니다. 지혜는 그들 앞에 펼쳐졌지만 그들에게 그것을 볼 눈이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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