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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얼마 전에 사목회의가 있었습니다. 잠깐 잠깐의 틈이 날때마다 모여있던 본당 간부님들에게 "쉬는 동안 본당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서 어떤 것을 할 수 있을지 말씀 나누시기 바랍니다."라고 부탁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중의 누구도 본당에 현재와 앞으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마음이 그 주제에 가까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몇 번이나 말씀하실 주제를 적어 오시라고 해도 늘 해 오시는 분들 외에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분들의 마음이 그 일에 가까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세상에서 요구되는 어떤 직분에서 무언가를 이야기 나누어야 하고 문서화 해야 한다면 그들은 다른 것을 다 제쳐두고 그것을 먼저 이룰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세상에서 얻을 것을 잃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참외 재배를 위해서 하우스 비닐을 정부에서 무상으로 지원하는데 그에 상응하는 문서 작업이 필요하다고 하면 적지 않은 이들은 동분서주 해 가면서 그 문서를 완수하려고 애를 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공짜로 주어지는 것은 얻고 싶고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거기에 가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에 가까이 있는 것을 늘 떠올리고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것은 멈출 수가 없습니다. 잠에서 깨어나 의식을 회복하면 늘 시작하는 일입니다. 가장 마음 가까이 있는 것을 먼저 떠올리고 그것에 신경을 씁니다. 심지어는 자면서까지 그것에 관한 꿈을 꿀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꿈 이야기를 하는 사람과 그에 대한 그 자신의 반응을 살피면 통상적으로 그가 평소에 어떤 것을 간절히 바라는지가 어렵지 않게 드러납니다. 돼지꿈을 꾸면서 복권을 사야겠다 하는 사람은 평소에도 늘 '돈'을 자신의 삶의 중심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중심에 있는 사람은 자신이 꾼 꿈 안에서도 하느님의 뜻을 찾게 마련입니다. 성경 안에는 바로 그 꿈을 통해서 하느님의 메세지를 이해한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탐욕스런 사람에게 같은 꿈을 보여주면 그들은 당장 가서 로또를 살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사다리꿈을 통해서 하느님을 떠올리고 그분을 찬양했지만 권력욕이 많은 사람이라면 자신이 높은 자리에 오르는 꿈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의 부귀영화를 기대할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사람들은 수많은 기도문 속에서 하느님을 찬미 찬양합니다. 하지만 실제 그들의 마음이 찬미 찬양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이 전능하다고 하면 옳다고는 하지만 그 전능 속에서 외아들에게 십자가를 지게 했다고 하면 그건 자신들의 구미에 맞지 않는다고 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느님의 전능을 찬미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합리성을 찬미 찬양하는 셈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과 전통을 소중히 하고 지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부딪히면 하느님께서 본질적으로 바라시는 계명을 버리고 자신들의 전통을 고수하려고 듭니다. 오늘 복음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지만 이는 오늘날에도 얼마든지 벌어지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한다지만 적지 않은 경우에 그것은 '자신들만의' 신앙생활인 경우가 많습니다. 입술로는 하느님게 좀 더 나아가기 위해서 거룩한 삶을 지향해야 한다고 하지만 자신들이 지금껏 해 온 인간적 관습을 해칠 때에는 오히려 그것에 반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본당에서 하나의 대표적인 것이 성지순례 후에 돌아오면서 버스 안에서 반드시 술을 마시며 춤추고 놀아야 한다는 관습입니다. 심지어는 국법도 금지하고 있는 이 관습이 도대체 어디서 기인한 것일까요? 이에 대해서 부끄러움을 가지기는 커녕 그렇게 하지 않는 이, 그렇게 하지 않도록 도우려는 이에 대해서 은근히 반감을 지니기도 합니다. 심지어 한 분은 저에게 '이건 이렇게 해야만 하는 일이다'라며 설득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하고 싶은 대로 하시라'고 했습니다. 다만 강요하지만 말아 달라고 부탁했지요.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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