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아프면 일할 수 없다




아픈 사람은 일하지 못합니다. 당연한 이야기지요. 육체가 아픈 사람은 육체로 할 수 있는 일을 못합니다. 그리고 영혼이 아픈 사람은 영혼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영혼이 아픈 이가 참된 신앙을 전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부인은 병이 낫자 봉사를 시작합니다. 이를 거꾸로 생각해보면 봉사를 한다는 것은 병이 나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봉사를 하지 않는 이, 다른 이를 위한 희생을 하지 않는 이는 여전히 영혼이 아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 안에서 하는 모든 것이 봉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가 미사에 나오는 걸 봉사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건 봉사가 아니라 의무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의무로 하는 일은 어찌할 수 없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의무인 일은 해야만 하는 일이고 하지 않으면 오히려 나 자신이 불행해지는 일입니다. 신자가 미사를 나오는 것은 안나와도 될 것을 내가 나와주는 거창한 일이 아니라 미사에 나오지 않으면 그 결과가 영원 안에서 나에게 불행으로 닥치기 때문입니다.


봉사라는 것은 자발적인 것이고 기꺼운 마음으로 희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런 진정한 의미의 봉사를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다들 어쩔 수 없이 등떠밀려 무언가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봉사를 시작하는 이는 병이 나은 이들입니다. 이들은 병세의 위중함, 영혼이 아플 때의 괴로움을 잘 체득한 사람이고 거기에서 해방된 자신에 대해서 하느님 앞에서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하는 이들입니다.


저녁이 되고 해가 지는 것은 외적으로 드러내는 내적인 상태를 비유적으로 의미합니다. 영혼에도 빛이 지고 어둠이 찾아올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병든 이들이 늘어나고 마귀 들린 이들이 늘어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구원자가 절실해지고 필요해지게 됩니다. 어둠이 없으면 빛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때로 찾아오는 영혼의 어둠은 역설적이게도 주님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키게 됩니다. 사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삶에 어두움이 드리울 때에 하느님을 찾았습니다.


예수님의 활동은 두가지로 요약됩니다. 병자의 치유와 마귀의 퇴출입니다. 그리고 마귀에게는 특별히 함구령을 내립니다. 그들은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은 거짓에서 기인하는 것이고 악한 의도가 가득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해가 떠오를 무렵, 아직 캄캄하지만 주님은 그 시간에 기도하십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러해야 합니다. 빛이 있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영혼이 어둠에 감싸여 있을 때에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조건이 모두 갖추어진 아름다운 환경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이런 상황에서 기도가 될까 싶은 순간에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순간에는 가능하면 다른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합니다.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외딴곳이 필요하고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지난 밤의 치유와 구마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본래의 목적은 치유와 구마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목적은 '복음 선포' 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극대화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뒤로하고 그곳을 떠나갑니다. 그리고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복음이 필요한 곳을 찾아 다니십니다. 예수님은 한 곳에 머물러 정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필요를 찾아 다니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안정을 추구합니다. 익숙한 것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사명과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자신의 인간적 필요와 욕구를 기꺼이 내려 놓습니다.


이제 이러한 일련의 내용들을 바탕으로 우리 스스로의 신앙을 식별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평온을 찾는 신앙은 너무나 쉽게 엇나갑니다. 십자가는 근본 편안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최종적으로 안식을 주시지만 그 안식은 당신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것입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준주성범

준주성범 라틴어로 씌어진 15세기의 신심서(信心書). 저자는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 1380~1471)로 알려져 있다. 모두 4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편의 제목은 `영적 생활에 유익한 훈계'(Admonitiones ad spritualem vitam utiles), 2편의 제목은 `내적 생활을 지도하는 훈계'(Admonitiones ad interna trahentes), 3편의 제목은 `내적 위안을 얻는 법'(Liber internae consolationis), 4편의 제목은 `성체성사에 대한 훈계'(Devota exhortatio ad sacram communionem)이며, 1,2편은 주로 묵상과 기도로 이루어져 있고, 3,4편은 대화(對話)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그리스도교인 생활의 기본원리들을 명백히 밝혀 주는 영신지도서로서 교회 신심에 많은 영향을 주어 일찍부터 세계 각국어로 번역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냐시오(Ignatius de Royola)의 《영신수련》에 이용되었고, 또 17세기에 일어난 프로테스탄트의 경건주의(敬虔主義, pietismus)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활동하던 서양 선교사들이 한역(漢譯)한 《경세금서》(經世金書), 《준주성범》이 전해져 두 책 모두 한글로 번역 필사되었고, 1938년 연길교구의 차일라이스(V. Zeileis, 徐) 신부가 라틴어 원본을 번역한 《준주성범》이 간행되었으며 그 뒤 1954년 윤을수(尹乙洙) 신부가 새로 번역한 《준주성범》이 경향잡지사에서 간행되어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이 책은 전 세계적으로 성서 다음 많이 읽히는 책이다. 제1편 영적생활에 대한 유익한 훈계 제1장 그리스도를 본받음과 세상의 모든 헛된 것을 업신여김 1.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 (요한 8,12) 이라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훈계하시는 말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