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다시 속이 북받치시어 무덤으로 가셨다. (요한 11,38)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셨던 것은 죽어버린 자신의 친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라자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분명히 인지하고 계셨기에 그것이 그분에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거기에 모여든 이들의 변하지 않는 마음, 여전히 세상을 추구하고 진정한 빛을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그들의 마음 때문에 안타까워 하신 것입니다.
라자로는 부활할 예정이었고 그것은 일찍부터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더 많은 시간을 지체하여 마을에 도착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완전히 죽어버린 한 인간이 다시 살아 나오는 것을 목격하여 이 사건을 절대로 잊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일은 그대로 일어나게 됩니다. 라자로는 죽어버렸고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분명하게 두 눈으로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예수님이 오신 것이지요. 예수님은 생명의 복음을 지니고 오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생명이셨고 또 누구든지 원하는 이에게 그 생명을 나누어 줄 수 있었지요.
역설적이게도 문제는 죽은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엄청나게 큰 일이 될 능력이지만 예수님에게는 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육신이 골백번 죽었다 깨어난다 하더라도 영혼이 다시 살아나지 않으면 한 인간의 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발단으로 ‘수난’의 단계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전까지 잘 간수해 오던 마지막 방어선을 이 라자로의 부활을 통해서 무너뜨려 버린 것이지요. 악인들의 시기와 증오는 바로 이 라자로의 사건을 통해서 폭발하게 되고 예수님의 죽음이 앞당겨지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 사건이 없더라도 예수님을 믿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징표는 주어져야 했고 사람의 아들은 이 일을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의 믿지 못하는 마음, 자신의 영혼을 진정으로 속해야 하는 곳으로 들어높이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지켜보아야 했던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북받치게 한 일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생은 정점을 넘어 수난과 죽음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은 엉뚱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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