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짓는 방법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더라도 참으로 비슷할 것입니다. 먼저는 기초를 놓고 그리고 기둥을 세우고 마침내 대들보를 얹는 것이지요.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대들보부터 공중에 붙들어매고 집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영혼을 바른 길로 이끌어가는 것도 비슷하지요. 그래서 모든 종교들은 비슷한 양태를 지니는 것이지요. 결국 바람직한 인간, 정돈된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가톨릭 신자들에게 불교의 가르침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입니다. 불교가 가르치는 바, 수덕을 위해서 필요한 바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종교가 다 거기서 거기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큰 오류가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생히 살아계시는 하느님과 그분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 안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있는 영역이 있는가 하면,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되는 영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신비적 영역’이라고 표현합니다.
인간의 지혜는 놀랍습니다. 하느님을 매우 닮아 있기에 우리는 우리의 지혜로 수많은 업적들을 이루어 내었지요. 그러나 하느님의 지혜는 ‘초월적인’ 것입니다. 그분의 지혜로움은 세상 그 어느 인간의 지혜 가운데 으뜸이라도 이길 수 없지요.
그분이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신비입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지혜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는 마치 근본 패러다임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악인들을 위한 선인들의 희생… 죄악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고 감싸안는 사랑. 이는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통해서 그것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때로 불교가 매력적이라고 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조금 안타깝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가톨릭 신앙의 정수를 아직 맛보지 못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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