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내면의 기준에 따라서 추종하는 것이 달라집니다. 내면에 아름다움과 화사함에 대한 욕구가 있다면 외적으로 더 아름답고 더 화사한 것을 추종하게 되겠지요. 물질적인 탐욕이 큰 사람에게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선호하는 대상이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신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신앙은 오직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하느님을 향해 방향지워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외적으로 그리 아름답지 않아도 또 돈을 벌게 하기는 커녕 도리어 우리의 노력과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라도 그것이 하느님을 향한 방향이면 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신앙과 충돌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육신은 더 높고 더 많고 더 부유하고 더 화려한 것을 원하는데 신앙이 가리키는 방향 가운데에는 그러한 것과는 상관이 없는 것들이 많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사람들은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이들이 신앙을 등한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내적 선호가 여전히 세상을 향해 있기 때문이지요. 좀 더 엄밀히 말하자면 자신의 자유의지가 세상을 선택해 버린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선택한 것에 책임을 져야 하는 시기가 다가옵니다. 세상 안에서도 그렇고 영원 안에서도 그렇습니다. 인간은 언젠가는 자신이 한 선택의 결과물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의 기쁨 대신에 한시적인 기쁨을 선택한 이들이 그 한시적인 기쁨이 사라지게 되면서 고통을 겪게 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요.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너무나도 저속한 욕구 속에서도 영원한 나라를 갈망하기 때문에 ‘이상한 수단’을 개발해 내게 되었습니다. 즉, 특정한 외적 행위를 하면 영원한 나라를 얻는다는 우격다짐을 하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특정한 외적 기도 행위를 얼마 채우면 천국을 얻는다는 식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회개와 믿음의 생활, 의로움의 구체적인 실천이 없이 외적이고 형식적인 행위의 신앙생활이 대두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식의 신앙생활은 의외로 영원한 형벌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이들에게는 매력적인 수단이 되어 사람들은 너도나도 그런 수단을 갈구하게 됩니다. 물론 한계는 분명히 드러납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나의 온 존재를 바쳐서 헌신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을 거기에 헌신하다가 지겨워지거나 다른 성가신 일이 생기면 당장에 내던져 버릴 수 있는 하나의 활동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게 되었지요.
우리는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진정 내면의 영혼이 원하는 바로 그것을 회복하고 그 참된 방향을 회복해서 그리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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