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움직이는 원리야 늘 동일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은 ‘이익’입니다. 얼마나 이익이 되느냐 안되느냐를 따져보고 단 0.1퍼센트라도 이득이 존재할 때에는 움직이는 것이지요. 물론 개개인의 욕심에 따라서 그 비율에서 차이가 나는만큼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자이냐 아니냐를 바로 세례의 유무로 따지고 드는 것이 위험한 이유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인의 여부는 그의 외적 조건으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도 수도 없이 반복해서 가르치신 부분이기도 합니다. 날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대표적인 이야기이지요.
우리는 그 내면의 방향성에 주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는 바로 이 세상의 효율성과 이득을 벗어난 범주를 살아가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하늘의 뜻’에 대한 신뢰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즉, 비록 지금은 손해를 보지만 하늘에 계신 분이 참되고 올바르시니 언젠가는 당신의 의로움대로 이루어 주실 것을 신뢰하는 이가 바로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그 순종의 최고봉이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다투고 싸웁니다. 저마다의 이득이 합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좋은 교육이 있다고 사제가 보내더라도 자신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싶으면 당장 거절하는 것이 오늘날의 세태입니다. 겉으로야 온갖 이유를 들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결국 마음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좋은 직분을 합당한 사람에게 수여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언뜻 다른 수만가지 이유를 대겠지만 결국 자신이 아직 하기 싫다는 것이 가장 으뜸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유에는 ‘자신에게 별로 득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주된 흐름이지요.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 자기 자신에 대한 분별을 바탕으로 직무를 수락하고 거부하는 경우도 있을테지요. 하지만 무언가를 못하겠다고 잡아빼는 사람들이 주마다 한번은 다른 자매들과 어울려 식사를 할 시간은 있고 커피를 마시면서 두시간이고 세시간이고 수다를 떨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걸 보면, 정말 그들이 그토록 바쁜가 싶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비록 교회 내의 직무에로의 초대는 거절한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본질적 초대는 거절하지 않는 우리들이었으면 합니다. 그분의 부르심은 ‘늘’ 다가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때가 이르러 다가오는 것이고 그 때를 거절하면 다음의 시기가 도래할 때까지 얼마만한 기다림이 있어야 하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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