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 측에서는 이런 사제를 찾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일단 내 목소리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제, 그리고 한 번 만나고 나면 다시 만날 일이 없는 사제, 그리고 무슨 죄든지 그냥 다 좋으니 아무런 조언도 하지 않고 그저 듣기 좋은 말 몇마디만 해 주는 사제…
하지만 이런 사제를 찾아다니는 신자의 그 마음 자체는 사실 바람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는 비유를 하자면 병에 걸렸는데 가장 불성실한 의사를 찾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이번 한 번 만나고 나면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임시로 파견된 의사라서 환부를 제대로 점검하지도 않고 그저 다 괜찮다고 하면서 아무 약이나 처방해 주는 의사와 똑같은 셈이지요. 그렇게 상처를 보고 나면 상처가 낫는 것이 아니라 도로 상처가 썩어들어갑니다.
하느님 측에서는 이런 고해를 주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좋은 의사가 하는 일 그대로입니다. 그는 환자가 아파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가능하다면 고통을 최소화하기 위해서 노력은 하겠지만 의사의 본질적 사명은 단순히 고통을 줄이는 게 아니라 이 고통을 일으킨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아픔을 무릅쓰고서라도 원인을 찾기 위해서 고군분투합니다. 필요하다면 상처를 더 벌려 보더라도 그 원인을 파악해 내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상처에 가장 적합한 치료방법을 강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사제는 고해자와 우연히 만나는 게 아니라 고해자를 이해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고해는 한 사제에게 ‘지속적’으로 보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그리고 사제로서 올바른 분별을 위해서 때로는 필요한 질문을 던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고해 당사자로서는 어떻게든 빨리 죄를 내던지고 도망가 버리고 싶겠지만 올바른 고해 사제는 고해자의 상태를 충분히 이해할 때까지 분별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현재의 상태를 고해자 스스로 이해할 수 있는 합당한 도움이 되는 조언을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제가 만나게 되는 적지 않은 신자들은 아직 신앙적 유아기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고해해야 하는지를 잘 모를 뿐더러 고해의 수치심을 최소한을 줄이기 위해서만 노력할 뿐, 진정으로 자신이 영적으로 어디가 아픈지, 그리고 그 아픈 부위를 어떻게 하면 개선시킬 수 있는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의 ‘판공’이라는 제도는 이러한 성향을 더욱 가중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주임 신부님의 사목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그분을 만나는 일이 없는 경우도 허다하게 되어 버렸습니다. 일년의 두 번의 판공이 치뤄지는 동안 손님 신부님만을 찾아서 얼른 죄의 쓰레기를 치워 버리기만 하면 되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올바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정작 우리의 내면의 어지러움은 더욱 가중될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의 성향은 더욱 굳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우리는 결코 고해성사를 소홀히 할 수 없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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