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퀴나스의 일대기를 다룬 책을 읽고 있는 중입니다. 거기에서 '노동'의 다양한 측면을 다루고 있네요. 때로 정치적인 의견에 물든 사람들이 사제에게 '몸으로 하는 노동'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내는 봉헌에 의지하지 말고 자기 밥벌이를 하라는 식입니다. 그러면서 곧잘 하는 말이 성당에 돈내지 말자는 식으로 귀결이 됩니다. 이런 의견은 언뜻 상당한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여러분은 다음과 같은 종류의 말을 자주 들어보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신부님도 결혼을 해봐야 해."
"신부님들이 직장에서 고생을 안해봐서 그래."
이러한 사고 속에는 신부님들은 현실적으로 그 어떤 구체적인 노동의 괴로움이나 고통도 당해본 적이 없다는 배경이 깔려 있습니다. 몸을 써서 일을 하고 괴로움을 겪는 것이 더 힘들고 괴롭다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습니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요, 저는 선교지에서 한국의 그 어떤 사람들보다 더 활발히 활동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이런 비판에서 기본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 지 모릅니다. 한동안 '교회의 실질적인 가난'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평신도 신학자라는 사람이 끊임없이 자신의 논리를 펴는 동안 저는 가장 가난한 곳에서 선교사로 머무르면서 그의 의견이 균형잡히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도 현대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의 기본 시각 안에는 사제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으로 간주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노동의 가치를 신성하게 여깁니다. 하지만 그 범주를 전인류 공동체 차원으로 확장합니다. 즉 노동의 다양한 양상에 대해서 다룹니다. 꼭 손으로 곡괭이를 들고 땅을 파야만 노동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활동 속에 노동의 가치가 포함된다는 것을 상기시킵니다.
가르치고 설교하는 일도 분명한 하나의 노동이며 그 일에 매진하기 위해서 사회의 도움을 받는 것은 정당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다음은 책의 일부입니다.
"이 문제 전체는 '노동 신학'을 위해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포함해서 어느 시대에나 연구하고 가를칠 가치가 있다. 오늘날 일부 성직자들은 자신의 메시지와 영적 봉사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고 육체 노동을 통해서 생계를 유지할 필요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특히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성무일도를 음송하고 거룩한 가르침을 설파하는 일에 헌신하는 도미니코회원들은 토마스가 설명하고 있는 대로 신앙인의 의사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렇지만 그 임무들이 '따로' 덤으로 수행되어야 할 일들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백성을 위한 그들의 봉사는 장엄서약으로 축성되고 수도회 규칙에 따라 살겠다는 맹세로 선언된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치는 봉헌으로 알아들어야 한다."
제임스 와이스헤이플, 토마스 아퀴나스 수사, 이재룡역, 성바오로(2012), p.182.
선교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저로서는 사실 선교지에서의 그 온 몸을 다하는 봉사에 비해서 지금 하는 일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기만 하고 실질적인 봉사가 아닌 게 아닌가 하는 막연한 생각을 품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이 항상 부담스럽게만 느껴졌지요. 그러나 이제는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역할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지요. 사람들이 기쁘게 일하고 실천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 누군가는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다양한 역할들로 꾸며져 있습니다. 신부님들 중에서도 실제로 몸을 쓰면서 일하는 선교사 신부님도 있고 또 본당 안에서 각종 사람들의 다양한 만남 속에서 여러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신부님도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신부님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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