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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주제들

 하느님은 누구에게는 신경을 쓰고 누구에게는 신경을 끄고 지내시는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의 비유로 모든 것이 설명된다고 생각한다. 가장 버림받은 것처럼 느껴지는 이 가장 가까이 머물러 계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은 그 누구도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래서 그 누구도 자신이 버림받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하느님은 미래를 아시는가? 인간은 정해진 운명을 따르는가?

공을 손에서 놓으면 땅으로 떨어진다는 계산을 할 수 있듯이, 고성능 컴퓨터가 있으면 사물의 움직임을 미리 시뮬레이션 할 수 있듯이 인간의 미래상도 하느님의 전지전능함 속에서 그려질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이 그렇게 미리 그려진 선대로만 간다면 죄의 벌도 구원의 상급도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에 '자유의지'라는 변수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인간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미리 그려진 노선을 바꾸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그렇게 새로운 결심을 세울 때마다 하느님의 눈에 우리의 앞길은 새롭게 그려보이게 될 것도 예상해 볼 수 있다. 하느님은 미래를 아시지만, 그 미래를 결정짓는 핵심 열쇠는 우리 자신에게 있다.


운명론은 없다, 그러나 운명론에 스스로를 속박시키는 사람은 있다.

운명론은 존재하지 않는다. 운명론이라는 것은 인간의 길이 정해져 있고 미리 알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운명론과 연계된 모든 인간의 어리석은 활동들도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철학, 점, 사주 등등의 여러가지 요소들은 인간의 미래를 미리 점칠 수(또는 계산할 수) 있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은, 자신의 자유의지가 죄와 어둠으로 인해서 '중독상태'에 빠져 있는 사람은 자신의 자유를 온전히 수행할 수 없고 그의 노선은 정해진 길로 갈 가능성이 높아질 수는 있다. 술에 중독된 사람이 주머니에 돈이 있고 술집이 가까이 있으면 그 술집으로 들어갈 것은 거의 자명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장사치들은 자신의 미래를 궁금해하는 이들에게서 사전 정보를 캐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그가 움직일 길을 정해줄 수 있으며 그 말 자체가 그를 휘어잡아 오히려 다른 가능성을 가로막아 버리기도 한다. 동쪽으로 가면 재수 없다는 말에 동쪽이 그날부터 괜히 싫어지는 일이 생겨나는 이유를 이런 근거에서 발견할 수 있다.


누구에게 삶의 길을 물어야 하는가?

세상 안에서 '성공'을 거둔 이에게 묻는다면 그가 이루어 온 바에 대한 길을 소개받을 수 있다. 근면, 성실, 기회의 포착 등등을 지도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 안에서 무언가 이룬 사람에게 기초적인 덕을 전수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영원'을 향한 길은 영원 안에 머무르시는 분에게 길을 물어야 한다. 그래서 신앙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길을 발견할 수 있다. 공항 이용법을 아무리 알려 주더라도 결국 비행기 표를 구입하지 않으면 그 공항을 떠나지 못하듯이 우리의 생의 여정의 마지막에 영원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참된 신앙에 대해서 배워 알 필요가 있고 그 길은 오직 하느님의 몫이다.


멈춰서 보아야 한다.

우리는 컴퓨터를 사용하면서 상당히 많은 과학적 진리 위에 살아간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중력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서도 그것을 사용할 수 있듯이 과학 안에서도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기술화 하여 사용하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도 우리는 과학이라는 영역이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을 가장 완벽하게 설명해 낼 수 있다는 듯이 '신뢰'를 두고 있다. 그것은 훈련된 결과이다. 과학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이 문명의 혜택을 가져오고 우리에게 더 편하고 쉬운 삶을 선물해 준다는 것이 무조건 '좋은 일', 즉 '선'이라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는 한편 우리의 내적 가치들은 너무나 쉽게 무시되어 왔다. 인내, 겸손, 호의, 선의, 믿음, 사랑, 성실, 책임감 같은 것들은 지금의 현상을 중요시하는 시대에 너무나 시대 착오적인 것으로 내비춰진다. 현대의 소비주의 문화는 참지 말고 사야 한다. 불편함을 견디지 말고 돈을 벌어 메꾸어야 한다. 이것에 세뇌당해 온 현대인들은 문제가 생기면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안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제는 외적인 요소의 결핍보다도 궁극적으로 내적인 요소의 결핍에서 비롯한다. 하지만 이를 진지하게 묵상하고 성찰할 시간도 없다. 행복해지고 싶으면 멈춰서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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