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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귀를 기울이는가?




우리는 스스로 성장해 오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우리를 키워 주었고 우리를 성장시켜 주었습니다. 지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배웠고 그가 지니고 있던 지식을 주입 받았습니다.


곤란한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가 아무리 '독립적'이라고 한 들, 우리는 독립적으로 사고하기까지 필요한 생각의 근거들은 전해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절대로 독립적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타인에게 많이 기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문제는 과연 누구에게 기댈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친구'를 찾습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친구들은 우리에게 '조언'해 줄 수 있는 이들일까요? 아니면 그저 나에게 위안을 던지려는 존재일까요? 값싼 위안은 우리를 일시적으로 위로해 줍니다. 그러나 그런 종류의 위안은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방향에 수정이 필요할 때에 우리는 반드시 필요한 조언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조언은 길을 아는 사람만이 답해 줄 수 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허황된 조언에 귀를 기울입니다. 삶의 진리를 찾으면서 본인도 방황하는 이들에게 그 문제를 맡깁니다. 그러다보니 엇갈린 길이 더 엇갈리게 됩니다. 무언가를 고치고 성장해야 하는 이들이 도리어 퇴보하고 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분이 길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하느님으로부터 오셨고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법을 아십니다. 세상 그 어느 누구도 모르던 길입니다. 우리는 세속에서 영리할 수 있지만 영적인 면에서 장님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길을 배우려면 길을 아는 사람에게 물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 길을 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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