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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을 어기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핵심 계명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때에 바로 계명을 어기는 일이 됩니다. 하지만 무엇이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 일일까요? 또 무엇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일까요?


우리가 상상하는 하느님이 있고 실제의 하느님이 있습니다. 상상의 하느님은 아주 조잡한 분으로 우리가 드리는 외적인 것을 받고 즐거워하는 속좁은 하느님입니다. 예를 들어 봉헌금을 5천원 내다가 만원 내면 좋아한다거나 5단 묵주로 기도하다가 20단 묵주에다가 양팔 들기까지 합쳐서 기도해주면 좋아하는 식입니다. 이런 하느님은 실제로는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종교를 장삿속으로 만들려는 이들의 편의에 따라서 만들어진 하느님일 뿐입니다. 그런 하느님이라야 사람들이 현재 내어 바치는 것들에서 더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의 하느님은 전혀 다릅니다. 실제의 하느님은 위엄있는 분이고 진정한 '창조주'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의 일부가 아닌 '모든 것'을 원하십니다. 그런 하느님을 섬기는 방법은 외적인 방식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외적인 행동은 내면의 표출에 불과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을 온 마음과 영혼과 힘을 다해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그 사랑의 구체적인 실행이 모든 삶 안에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에 가진 것이 금전이면 금전을, 노력이면 노력을, 목소리면 목소리를 뭐든지 바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봉헌이 되고 그것이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 그분이 이미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에 아주 조금이나마 보답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이제 두번째로 살펴볼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그저 뜬구름 잡는 일로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라고 하니 사랑을 하는 시늉을 하거나 헛된 사랑에 빠져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된 사랑은 하느님 때문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반드시 전제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진리와 선'을 기반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고 선이 존재하지 않는 데 사랑을 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거짓된 사랑이거나 헛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의 자식이 지옥을 체험하건 말건 상관없이 내 자식만 잘 된다는 식의 사랑은 거짓된 사랑이고 엇나간 사랑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면서 '끼리끼리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 소위 코드가 맞는 사람끼리 어울리는 것을 두고 사랑한다고 하는 식입니다. 그렇게 따지자면 악마들도 서로 사랑합니다. 그들도 서로를 도와야 더 악을 잘 실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사랑은 이런 사랑입니다. 그건 모두가 하느님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들은 돕고, 그 반대에 있는 이들은 꾸짖기도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은 때로 매섭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마치 사랑이 아닌 듯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인들을 쫓아내실 때에 그러하였고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 앞에서 그들을 질책하실 때에도 그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이 하느님께 돌아오기를 바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계명을 완수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사랑의 계명을 어긴다는 것은 오히려 외적으로는 부드러운 듯이 보이지만 그 내면에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이 그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선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은 겉으로는 온통 온유한 외면을 띠고 있을지 몰라고 내면으로는 사랑을 어기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계명을 지켜야 합니다. 즉, 계명이 근본적으로 의도하는 바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충실히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는 하늘 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입니다. 비록 현세에서는 사람들에게 무시 당하고 심지어 핍박을 당할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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