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은 죽은 공간입니다. 그리고 죽음은 두 가지 차원을 지닙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생명의 단절이고 다른 하나는 영적인 단절입니다. 예수님은 두 차원을 다 극복할 수 있는 분입니다. 다만 예수님에게는 영적인 단절이 항상 우선합니다. 그래서 무덤은 영적인 단절의 공간 속에 있는 이들, 그러나 아직 희망이 살아있는 이들을 의미하고 바로 현세와 연옥의 영혼들을 의미합니다.
끌어낸다는 것은 그곳에 가라앉아 있는 이들을 꺼내는 구체적인 힘을 의미합니다. 오직 주님만이 그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주님은 아무리 깊은 곳에 머물러 있는 영혼이라도 꺼내올 수 있습니다. 다만 조건이 하나 있으니 그 영혼이 그것을 간절히 원해야 하고 주님께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이는 마치 아무리 실력이 출중한 의사라도 환자가 자신의 몸을 내어 맡기지 않는 이상은 수술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 의지를 하느님은 존중하십니다. 그것은 곧 당신 스스로에 대한 존중과도 같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운명이라 자유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면 하느님은 애시당초 주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을 주셨다는 것은 그것이 쓸모있다는 의미이고, 죄스런 자유 속에서도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며, 자유가 존중 받아야 마땅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당신께 내어 맡길때까지 예수님은 기다리시고 우리가 언제든 우리를 내어 드릴 때에 그분은 기꺼이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이스라엘 땅이라는 것은 우리가 가야 할 목적지,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는 곳을 의미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가는 곳을 모르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일찍부터 에견되어 있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우리는 ‘천국’이라고 부르고 ‘하느님의 나라’라고도 부르며 ‘약속된 땅’이라고도 부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 거룩한 영역을 지상적 차원으로 전락시켜 버렸습니다. 천국을 지상의 초라한 낙원과 바꾸어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야 할 진정한 영역은 영원한 나라이고 천상의 영역입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그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우리가 무덤에서 끌어올려지는 순간 우리는 주님을 알아뵙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이런 주님의 능력을 이미 체험한 이들이 있습니다. 영혼이 수렁에 빠져 양심의 고통에 몸부림치다가 주님의 빛을 받아 회복된 영혼들이 있습니다. 이런 영혼들은 자신의 고유한 체험을 다른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며 주님의 진정한 능력과 힘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면 세상의 그 무엇도 더는 두렵지 않게 되고 주님에게 진정으로 희망을 두고 기쁘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그들의 삶이 그들의 진실성을 증명할 것이고 이 몫은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말은 세상의 자녀들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여 깨닫고 뉘우쳐 돌아오는 일이 없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약속된 땅에 들어서서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의 진실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이를 이미 아는 이들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체험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 앞에 물건들이 놓여 있고 우리가 그것을 옮기는 것이 실제처럼 느껴지듯이 영적인 이들에게는 하느님과의 만남과 당신의 부르심이 실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에게 건네시는 약속 역시도 분명한 실제로 느껴지게 됩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재미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을 믿었던 사람들은 세상에게서 버려질 것이고 배신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영원을 믿었던 사람들은 현세에서 무시당하겠지만 최종적으로는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약속한 것을 실천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돈은 믿어도 주님은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많으니 불행한 일입니다.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리네. 파수꾼이 새벽을 기다리기보다 이스라엘이 주님을 더 기다리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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