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들이 한 일은 크게 두 범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사도들은 사람들의 병을 치유해 주었습니다. 둘째도 비슷하지만 조금은 차원을 달리하는 일입니다. 바로 더러운 영에 시달리는 이들을 치유하는 일이었습니다.
당대에도 여러가지 필요가 있었겠지만 사도들은 다른 것들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더 벌게 해 준다던가 고민하는 일을 해결해 주는 세상의 해결사 같은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사도들은 가장 근원적으로 인간의 두 가지 괴로움, 즉 영혼과 육신의 괴로움에서 그들을 해방시켜 주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육체는 여러가지 면에서 오묘합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그 육체는 영혼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합니다. 그래서 육체가 아프면 영혼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배가 고픈 것과 배가 아픈 것은 전혀 다른 두 종류의 고통입니다. 배가 고픈 것은 잠깐의 부족이지만 배가 아픈 것은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단식은 하지만 자해는 하지 않습니다. 사도들은 사람들이 하느님에게 다가서는 데에 방해되는 요소를 도와주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그 장애를 치워 주었습니다. 그것이 치유로 드러났습니다.
치유는 사도가 손을 뻗는다고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자비의 선물입니다. 그러나 굳이 치유의 합당한 과정을 설명해 보자면 그것은 치유받는 이의 내적 회개과 하느님을 향한 헌신에 달려 있습니다. 즉, 치유는 아무에게나 잘 되라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열매맺으라고 주어지는 일종의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치유는 따라서 ‘사명‘이 됩니다. 치유를 받은 이는 자신의 쾌락을 추종하기 위해서 치유받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치유받는 것입니다. 이를 간과하면 치유는 곧잘 악마의 장난이 되기도 합니다.
누군가 술을 더 많이 마시기 위해서 간을 치유받기를 원하고 있다면 그 치유는 과연 누가 선물하는 것일까요? 그건 하느님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죄를 지으라고 선물을 주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가 더 세속에 빠져 들기 위해서,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서 돈을 더 잘 벌기 위해서 지금 아픈 곳을 치유받기를 원한다면 과연 그 치유가 하느님에게서 온 것일까요? 의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도들은 치유는 단순히 육신을 낫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 이전에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것이 우선되는 치유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더러운 영이 쫓겨나자 자연스럽게 육신이 치유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치유받기를 원한다면 그저 손만 내밀어서는 안됩니다. 치유받기를 원한다면 진심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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