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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과거

예전 본당에서 자신이 옛날 대구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었음을 은근 자랑하던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열심히 신앙생활에 헌신하고 있었지만 그때만 해도 XX극장의 기도(교회의 기도가 아니라 표 받고 질서 잡는 사람)를 했다면서 자랑을 하곤 했지요. 그리고 그때의 깡패들의 무술 실력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발차기가 얼마나 빠른가 하마 사람을 딱 세워놓고 발로 귀때기를 타다닥 때리는데 발이 너무 빨라서 안보이는 거라요.”

참 흥미롭기도 했습니다. 그 시절의 세상사를 엿볼 수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할아버지는 그 깡패들이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하고 다녔는지 왜 정상적인 직업을 갖고 성실하게 살아가지는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런 화려한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외적인 화려함 때문에 사람들은 깡패마저도 찬양하곤 합니다. 하지만 훗날 그들이 자신들의 범죄로 감옥에 들어가거나 불행한 일을 당하고 모두가 더럽다는 듯이 멀찍이 떨어지지요. 하지만 둘은 다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화려했던 그가 결국 그 불행을 당하는 그로 바뀌는 것이지요.

멕시코와 남미의 화려한 갱단들이 황금 권총을 지니고 있고 대저택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혹하는 것은 세상 것들을 여전히 너무나도 사랑하는 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런 삶을 꿈꾸지만 그 결과는 받아들이기 싫어합니다. 참으로 이중적인 모습이지요. 하지만 그런 외적 화려함의 추구와 내적 공허는 떨어져 있는 두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같은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추구할까요?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왕년에…’라고 뭔가를 내세우기보다는 그냥 지금의 저를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이지요. 왕녀의 내가 지닐 수 있었던 것을 지금 지닐 수 없다면 그것은 헛된 것들일 뿐입니다. 왕년에 아무리 예쁘고, 왕년에 아무리 권력을 거느리고, 왕년에 아무리 유명해도 지금은 쭈글쭈글한 노땅인 셈이지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찬란한 지혜를 지니고 있다면 그 지혜는 영원히 빛을 발하고 진정으로 한 사람을 들어높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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