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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과 빛, 그리고 혼란 - 언더 더 스킨(Under the Skin) 영화평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SF 스릴러물입니다. 물론 세상에서는 스칼렛 요한슨의 전라 연기로 더욱 화제가 된 영화이지요. 하지만 저는 이 영화 안에서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았습니다.(이하 스포일러가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은 읽지 마십시오.)

어둠
극중에서 스칼렛 요한슨이 하는 일은 남자들을 유혹해서 집으로 데려가 그들을 ‘처리’하는 것입니다. 헌데 그 일련의 과정에서 우리가 유심히 살펴 보아야 하는 것은, 어둠의 유혹과 거기에 넘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스칼렛 요한슨은 아무나 유혹하지 않습니다. 유혹될 만한 대상을 선정하고 그에게 몇가지 유혹 거리들을 던지면서 그 과정을 심화시켜 나갑니다. 그리고 결국 최종적으로 걸려든 이들을 잡아들이지요. 하지만 때로는 유혹될 마음이 없는 이들(바닷가에서 수영하던 남을 돕는 선한 남자)도 우연한 기회에 잡아들이고, 얼굴은 엉망이지만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이들도 억지로 끌어 들입니다. 어둠이 하는 일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지요.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하는 일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소중한 것들을 ‘파괴’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고는 결국 자신이 늘 하던 루트에서 벗어나서 빛을 향해 나아가지요. 그 얼굴이 엉망이던 남자를 놓아주고는 자신은 같은 일을 하던 동료에게서 도망치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복장도 바뀝니다. 늘 우중충하던 갈색 모피를 벗어던지고 그 안에 입고 있던 분홍빛 스웨터를 입고 방황하지요. 이번에는 정반대의 일을 합니다. 여러 사람들의 호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지요. 불쌍한 자신의 처지를 도우려고 다가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지요. 그리고 그의 따스한 마음을 만끽합니다. 이때부터 음악 소리도 바뀝니다. 이전까지는 늘 우중충하던 소리에서 선율이 들리기 시작하지요.

혼란
하지만 여기에서 또 한 단계가 더 나옵니다. 빛을 찾아 나선 그녀에게 여러가지 혼란이 다가오지요. 마땅히 가지고 있어야 할 소중한 것이 없었던 그녀는 그로인해 남자와의 사랑이 실패한 이후로 다시 빛에서 달아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세상의 어둠이 그녀에게 덮쳐오는 것입니다. 같이 일하던 동료가 그녀를 추적하고, 낯선 남자가 그녀를 강간하려고 쫓아오는 것입니다. 결국 그녀는 그 낯선 남자를 피해 도망을 다니다가 결국 지금까지 모든 일의 계기이자 화근이 되었던 자신의 피부(스킨)를 뜯기게 됩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이 이전 정체성이었던 가식을 벗은 셈이지요. 그리고 본질과 가식이 서로를 마주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정신을 잃은 채로 멍하니 있다가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를 덮치던 낯선 남자에게 봉변을 당하고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인터넷 상에서는 단순히 스릴러물로서의 기준에 못미친다는 식의 영화평 일색이라서 제 나름의 영화평을 적어 보았습니다. 인간 내면의 어둠과 빛, 그리고 결국 벗어던진 자신의 가식 앞에 선 한 인간존재에 대해서 성찰해 볼 수 있다면 나름 의미있는 영화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전라의 수위가 높으니 사리 분별 가능한 어른들에게만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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