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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평범한 아이

문득 고등학교때가 생각이 났다. 난 늘 반에서 앞에서 두번째 줄 정도에 앉아서 수업 열심히 듣기 밖에 할 줄 모르는 아이였다. 시내 나가는 것조차 서툴러하던 정도였으니 대충은 알만하리라 생각한다. 특별히 문제를 만들지도 않고, 문제에 가담하지도 않던 정말 조용한 아이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한 친구가 나를 초대했다. 사실 그렇게 친한 부류는 아니었는데 어느 날인가 같이 옷을 사러 가기로 했다. 그리고 그 친구와 만나서 시내에 나가 옷을 샀다. 어떤 보세(당시 가짜 메이커 옷을 파는 가게의 통칭이었다.) 옷가게였는데 정말 엉뚱한 옷들을 샀다. 당시 유행하던 통이 넓은 힙합 바지 같은 것이었다. 다리도 짧은데 그 옷들이 날 얼마나 우스꽝스럽게 보이게 만들었을지는 지금 돌이켜보면 충분히 상상할만 하다.

그리고 친구는 나를 어느 주점으로 데리고 갔다. 당시 유행하던 레몬소주집. 거기에서 나는 나름대로 멋을 부리고 레몬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친구는 주변의 여대생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들을 가리키면서 나에게 넌지시 일러주었다. 그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머리가 길었던 아이들이 모두 고등학생들이라고 말이다. 나로서는 전혀 체험해 볼 수 없었던 그런 새로운 문화권 안에서 나는 정말 당황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 뒤로 나는 다시 그런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산 옷도 몇 번 입다가 말았다. 나에게는 그저 그런 청바지나 면바지가 더 편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행여라도 그 때 그런 세계에 혹해서 넘어갔더라면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돌이켜 보건데 별 친분 관계가 없던 그 친구가 그 당시 나에게 다가왔던 것도 나름의 목적이 있었으리라고 충분히 상상이 된다. 하다못해 그 옷가게 사장과 커미션을 주고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 당시에는 그런 나 자신, 다른 멋들어진 아이들처럼 놀아나지 못하는 나 자신이 초라하고 너무나 평범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하느님에게 감사드린다. 하느님께서는 내가 엉뚱한 곳으로 빠져들지 않도록 도리어 나를 지켜주신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청소년들, 특히나 내가 선교하는 곳의 청소년들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은 유혹거리들이 늘 놓여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애인을 사귀고 어린 시절에 성관계를 맺는 것이 자랑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마치 나의 어린 시절 내가 막연한 동경을 느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끼고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할 일이 더 많다. 숨어있는 것들의 진정한 실체, 단순히 외적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이 아닌 그 속에 감춰져 있는 것들의 실체를 밝히 드러내 주어야 할 사명감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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