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께서는 판관들을 세우시어, 이스라엘 자손들을 약탈자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저희 판관들의 말을 듣지 않을뿐더러, 다른 신들을 따르며 불륜을 저지르고 그들에게 경배하였다. (2,16-17)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시고 좋은 것을 주셨으며 또 그들이 엇나감에 따라 구원의 길을 알려주시고 그에 합당한 도움도 주십니다. 하지만 그 모든 도움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느님을 따르지 않았고 자신의 죄악을 더욱 굳혀 갔습니다.
사람들은 곧잘 하느님을 두고 비난합니다. 전능하신 분이 왜 모든 악을 없애 버리고 온 세상을 바로잡지 않느냐고 하지요. 그렇게 무능한 하느님이라면 자신들은 필요가 없다고도 합니다. 이런 말들은 언뜻 들으면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만 그 근본을 알고보면 지독히 이기적이고 편협한 생각에 불과합니다.
먼저는 인간이 지닌 소중한 보물인 ‘자유의지’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자신의 존재 의미 자체를 상실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유로움 때문에 우리가 하는 모든 선택이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이지요. 우리가 거대한 기계 장치의 하나의 부품이라면 우리는 우리가 아무리 기를 쓰고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원래 그렇게 해야 하는 일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자유가 없는 존재가 아무리 좋은 일을 해 본들 그것은 다른 의지가 있는 존재가 시켜서 하는 일일 뿐입니다. 우리가 설령 죄를 짓더라도 그것은 그렇게 되도록 되어있는 존재일 뿐인 것이지요.
사실 악마가 좋아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원래 그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고 주입을 시키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는 좋은 일은 의미가 없으며 우리가 설령 나쁜 짓거리를 하더라고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환경 탓이다, 부모 탓이다, 심지어는 DNA의 탓이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나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주변 환경의 문제라고 탓을 돌리고자 애를 쓰는 것입니다.
나아가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하느님’입니다. 즉 하느님이 자신들의 구미에 맞게 움직여주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비가 오면 누군가에게는 그 비가 절실하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 비가 싫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그 비가 좋다거니 싫다거니 하면서 하느님에게 그 비를 어찌 좀 해 달라고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비는 비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온 세상이 골고루 이롭도록 그에 합당한 자연을 준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이 겪는 고통은 다른 인간들의 소홀함에서 비롯한 경우가 많습니다. 다른 인간들의 이기적 결정이 결국 모이고 쌓이고 전해져서 누군가가 고통을 받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그런 결과에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런 결과가 일어나지 않게끔 최선을 다해서 악으로 기우는 이들을 도우려고 하셨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런 하느님의 노력은 아랑곳 없이 그저 결과만을 바라보면서 하느님을 비난하곤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앞에 주어진 판관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욕구의 노예가 되어 우리가 하고 싶은 일만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그 결과가 우리에게 돌아올 때가 있겠지요. 그때에 아무리 하느님을 원망해 보아야 소용이 없는 노릇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판관들을 세우실 때마다 그 판관과 함께 계시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내내 그들을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도록 하셨다. 억압하는 자들과 학대하는 자들 앞에서 터져 나오는 그들의 탄식을 들으시고, 주님께서 그들을 가엾이 여기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관이 죽으면 그들은 조상들보다 더 타락하여, 다른 신들을 따라가서 그들을 섬기고 경배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자기들의 완악한 행실과 길을 버리지 않았다. (판관2,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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