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은 울면서 ‘먹을 고기를 우리에게 주시오.’ 하지만, 이 온 백성에게 줄 고기를 제가 어디서 구할 수 있겠습니까? 저 혼자서는 이 온 백성을 안고 갈 수 없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무겁습니다. (민수 11,13-14)
음식은 하느님이 주시는 것,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 하지만 사람들은 곧잘 배가 고프다고 난리를 친다. 하지만 그들의 배고픔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고기’와 다채로운 먹거리가 없다는 불평이다.
만나를 먹고 하늘에 감사드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사람들의 저마다의 원성을 들어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다고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고 나면 과일을 찾고 과일을 먹고 나면 채소를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배고픔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엉망진창으로 튀어나온 욕구를 보기 때문이다.
“내 백성은 내 말을 듣지 않고, 이스라엘은 나를 따르지 않았다. 고집 센 그들의 마음을 내버려 두었더니, 그들은 제멋대로 제 길을 걸어갔다.” (시편81,23-13)
영적 지도자는 하늘의 만나를 얻어주는 사람이지 사람들의 저마다 엇나간 욕구를 돌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영적 지도자는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 다시 하늘의 만나를 즐기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지금의 시대에 이는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백성을 이끄는 임무를 맡은 이들이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그들은 자신들부터 만나를 먹어야 하고 그 만나에서 힘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 그 힘으로 다른 이들을 이끌 수 있게 되고, 또 그런 자신들의 표양을 드러낼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엇나간 욕구에 따라서 저마다의 지도자를 이끌어들인다. 자신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이들을 참된 지도자라고 추켜세운다. 하지만 정말 그러할 것인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손길을 담아내고 있어서 사람들의 매력을 끌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 하지만 하느님을 올바로 담아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모든 것들은 결국 길을 상실하게 된다.
예수님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잠시의 쉴 틈도 없이 사람들을 마주해야 했다. 심지어는 당신의 가장 소중한 친구인 세례자 요한을 잃은 순간에도 그것을 슬퍼할 시간도 없이 밀려드는 사람들을 상대해야 했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참된 메시아로 보기도 했지만 적지 않은 이들은 그를 그저 소문난 치유자로만 아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들을 상대하고 그들의 아픔을 돌보셨다.
우리가 지닌 적은 것이 하느님에게는 커다란 봉헌이 된다. 그리고 우리의 봉헌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을 이루게 한다. 한 거룩한 사제가 적지 않은 이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이킬 수 있다. 한 거룩한 평신도가 주변에 얼마나 많은 감화를 불러 일으키는지 모른다. 성인이 세상을 성화하는 법이다.
거룩함은 세상 안에서의 드높은 일로 드러나지 않는다. 거룩함은 지극히 소박한 일상을 하느님의 힘으로 이끌어 갈 때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오천명을 먹인 출처는 빵공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 봉헌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다.
지치는 여행이 틀림없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고 그렇다고 그들은 물러나서 제 먹거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와서 끊임없이 ‘고기’를 달라고 아우성 댈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런 이들을 보살핀 이유는 ‘가엾은 마음’ 때문이었다. 언젠가는 깨닫게 되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한 걸음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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