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사목회의를 했습니다. 본당의 현안들이 안건으로 오갔지요. 회의는 서로 의견다툼을 하는 게 아니라 홀로 해결하기 힘든 부분을 꺼내놓고 함께 해결점을 찾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같은 ‘공동체’라는 것을 잊지 않을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고 한 몸에서 가장 중점이 되는 부분을 보살피는 것이지요.
내년도는 저로서는 분주한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없던 저녁미사도 생기고 금요일 저녁에도 신자교육을 늘리고 또 첫영성체 교리교육도 제가 하겠노라고 이야기해 버렸습니다.
사실 웬만한 한국의 신자분들은 다 신앙을 가르칠 능력이 있습니다. 다만 주저할 뿐이지요. 누군가 나서서 하려는 마음이 없이 뒤에서 누군가 가면 뒤따라는 가주겠다는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총대를 메어야 합니다.
총대를 멘다는 것은 ‘책임’을 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일을 자진해서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데 책임은 지지 못하겠다는 것이지요. 특히나 오늘날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가중됩니다. 심지어는 자기 자식도 부모도 책임 지기 싫어하는 사태가 발생하니까요.
바로 이 책임을 지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책임지고 아내는 남편을 책임져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책임지고, 자녀는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능력이 있는 동안 다른 이들을 책임져야 합니다. 하지만 그 책임의 자리를 ‘돈’이 대신하기 시작한 때부터 우리에게는 ‘인간성’이 점점 상실되어 가고 있습니다.
돈을 주면 자신의 책임을 다른 이에게 부여할 수 있습니다. 제 방 청소는 자신의 몫임에도 불구하고 돈을 주면 그 일을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줍니다. 그러니 방을 최대한 아끼려는 마음 없이 마구 더럽히면서 돈을 준 사람에게서 본전을 뽑으려고 듭니다. 그러니 이런 구도 안에서는 도무지 인간성이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서로를 책임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사제로서 신자분들의 영적 성장에 책임이 있습니다. 신자분들은 역으로 저의 생활을 보살피는 책임이 있지요. 바로 그 덕에 제가 사제로서의 일을 더욱 열중해서 할 수 있게 되니까요. 우리는 서로를 책임지는 존재들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세상 만물들이 서로 그렇게 돕고 살아가도록 만드신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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