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다. 내가 아프기 전까지는 병원이 어디 있는지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 신음하는 사람들이 어떤 상태이고 어떤 괴로움이 있는지 전혀 상관이 없었다. 게다가 가능하면 그런 곳은 피하고 싶었다. 고통당하는 것은 내가 원치 않았던 것이니까.
하지만 아픔을 겪고 난 뒤, 그 야심한 밤에 고통에 신음하며 누군가가 나를 도와주기를 간절히 바래보고 난 뒤에는 비로소 그들의 아픔을 겪을 수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이고 또 내가 홀로 할 수 없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또 그러한 상황에서 나를 도우러 오는 이가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운 것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렇게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인간의 비참함을 직접 체험하시고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아버지에게 간절히 비셨다. 그리고 결국에는 사람들의 온갖 증오와 비방과 조롱 속에서 십자가에 매달리셨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 예수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다. 아들이 겪은 비참함 속에서 그 아들의 간청과 애원을 들으시고 부족함이 가득한 우리를 너그러이 보살피시는 것이다. 또 한 번 기회를 주시고, 또 한 번 기회를 주신다.
그러나 아직 자기 스스로 아파보지 않은 사람들, 자신이 지닌 것이 자신의 힘의 근거가 되는 사람들, 가지고 누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자신을 신보다 더 높은 존재로 간주한다.
물론 그들에게도 자신의 때가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느님을 신뢰하면 된다. 그 신뢰라는 것이 세상적인 시선으로는 너무나 어리석어 보이고 하찮아 보이고 미약해 보이지만, 우리는 그분을 신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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