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신앙생활에 있어서 활동성과 공동체성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주의적 신앙’에 대해서도 오해가 존재합니다.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은 채로 하는 모든 활동을 ‘개인주의’라고 한다면 반대의 주의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공동체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지요.
동양 문화권은 예로부터 ‘관계’를 중시해왔고 그 관계 안에서 주도적으로 이끌고 외적으로 활발히 움직이는 것이 미덕으로 치부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이 늘 두각을 나타내고 그 반대의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늘 무언가 부족하고 모자란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야 했지요.
하지만 신앙 안에서 활발한 활동은 반드시 외적으로 드러나는 활동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적으로도 얼마든지 활발한 활동이 있을 수 있고 바로 그 내적 활동에서 외적 활동이 기인해야 합니다. 역으로 외적으로는 활발히 움직이는데 실제로 내적으로는 지독히 고여있는 썩은 물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입에서 기도는 줄줄이 나오지만 그 기도문에 전혀 동의하지 않은 채로 습관적으로 바치는 기도, 외적으로 활동은 하는데 그 외적 활동이 자신의 우월감에 사로잡힌 교만한 활동을 하는 사람이면 그는 내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이 됩니다.
나아가 진정한 ‘공동체성’은 모두가 무언가에 열중해서 다같이 활동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공동체성은 바오로 사도가 말한 ‘그리스도의 몸’ 신학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손은 손의 역할을 담당하고 눈은 눈의 역할을 담당하며, 그 밖의 지체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자신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며 활동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활발히 움직이는 지체가 있는가 하면 정적인 지체들도 얼마든지 있는 것이고 그들은 그들의 고유한 특성을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지요.
적지 않은 본당들이 참된 공동체성이 아닌 왜곡된 ’공동체주의’에 빠져들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공동체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무조건 같이 하면 좋다는 식의 사상이지요. 심지어는 죄스런 행위도 같이 하면 그 죄책이 경감된다고 생각해서 함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곧잘 담배의 장점으로 친교를 들지만, 사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의 친교는 담배를 싫어하는 이와의 친교를 철저히 배제한 이기적인 친교에 불과합니다. 역으로 오히려 친교는 담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싫은 담배냄새를 참아가면서 담배피는 이들과 어울리려고 노력하는 데에서 진정으로 발휘되고 있는 것입니다.
마르타가 옳으냐 마리아가 옳으냐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둘 다 소중하고 중요한 지체들입니다. 문제는 활발히 움직이는 지체가 고요하게 예수님을 내적으로 활발히 맞이하는 지체를 두고 성질을 내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마리아는 소중한 몫을 택하였고 그 몫을 절대로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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