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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 이거 해주세요



“우리 아들, 딸을 대학 붙게 해 주세요.”
얼마든지 드릴 수 있는 청원입니다. 다만 문제는 다들 그렇게 기도하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경우도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는 것이지요. 왜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인데 자녀들이 청하는 것을 들어주셔야 하지 않나요?

단적인 예를 들어 봅시다. 두 나라가 싸웁니다. 그리고 두 나라의 군대에 참전하고 있는 두 그리스도인이 각자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느님 저희가 이기게 해 주세요.”
하지만 전쟁은 결론이 나고 결국 승자와 패자가 나뉘게 됩니다. 그럼 그들의 기도는 무의미한 것이었을까요? 하느님은 승자의 기도에 손을 들어주고 패자의 기도는 내쳐버린 것일까요?

일단은 긍정적인 면을 바라본다는 의미로 이 문제를 바라봅시다. 어려운 순간에 하느님을 떠올리고 그분께 청원을 드린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좋은 일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하느님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하고 그분께 가까이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일은 분명히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청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 앞서 대학에 대한 기도나 싸움의 승리에 대한 기도나 중요한 것은 본인들의 의지이고 본인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에 ‘하느님이 원하는 것’은 무시당하고 잊혀진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하는 행위와 하느님을 떠올리는 행위는 좋은 것이지만 그 다음 단계로 하느님을 떠올린 뒤에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받아들이는지 아닌지에 대한 주제에서는 실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원기도는 장려됩니다. 우리가 누구나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처음에는 누구나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청할 수 있고 그것이 이루어질 수도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을 계속 고집하다가는 서서히 ‘좌절감’을 체험하게 되겠지요. 그리고는 거기에서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 본질적인 신앙생활이 시작될 기회가 열리는 것입니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기도의 결과물을 통해서 스스로를 바라보십시오. 과연 나는 하느님께서 이루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인지 아니면 금방 잊어버리는 사람인지, 또 하느님께서 뜻하시는 다른 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인지 아니면 그냥 떼를 쓰는 어린이와 같은 사람인지 잘 분별하십시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숨은 일도 보시는 분이십니다. 저는 그분의 성실함과 선하심, 그리고 완전하심을 결코 의심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측의 오류인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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