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지 같은 사물을 바라보고 있다고 그들의 내면에 같은 생각이 깃들지는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믿음과 사랑을 키워나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증오와 원한을 키워나간 사람도 있습니다.
단순히 성당 안에 같이 머무른다고 다 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더 열렬히 따르기 위해서 언제나 자신을 빛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성당이라는 외적 환경 속에서 자신의 야욕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해서 애를 쓰는 이들도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움직이지 않는 물은 고이게 되고 썩게 됩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맑은 물이었다 할지라도 그 물이 고여서 정체되어 버리면 썩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신앙을 순진하게 받아들였다가도 그 신앙이 더는 움직이지 않은 채 고여서 ‘교만’과 ‘탐욕’에 젖어들기 시작하면 그 신앙은 썩기 시작합니다.
제도가 바뀐다고 사랑이 절로 시작되는 게 아닙니다. 물통을 아무리 높은 곳에 둔다고 절로 물이 움직여지는 게 아닙니다. 물은 흘러야 됩니다. 그리고 그 흐름은 각자의 개인의 고유한 활동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그런 고유한 활동들이 모이게 되면 큰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큰 틀을 뒤바꾼다고 해서 자동으로 움직임이 생겨나지는 않습니다. 특히나 사랑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법을 세우면 겁이 나서 사람들이 따릅니다. 세상은 그렇게 틀을 바꾸면 개인이 뒤따라 움직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은 공포와 두려움이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오직 사랑의 손길을 받은 이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사랑받는 이만이 사랑할 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일은 바로 이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으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배우겠다면서 성경을 들여다보지만 좀처럼 예수님께서 실제로 행하셨던 바를 찾아내고 그것을 뒤따라 살아가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큰 틀을 바꾸어 사람들을 지배하려 했던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나약하고 미천한 이들에게 사랑을 전해서 그 사랑이 모여들어 결국 세상이 변화되기를 바라셨던 분이셨습니다.
누군가를 심판하고 비난하기 전에 과연 나는 내가 그에게 요구하는 그만한 사랑과 실천이 있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내가 그 자리에 앉았을 때는 과연 나는 내가 그에게 요구하는 똑같은 일을 실천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지금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남들이 사랑을 실천하기를 바라고 있다면 우리는 또 한 명의 위선자가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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