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초대교회를 바라보면서 흔히 하는 생각은 초대교회의 사는 모습 그 자체를 하나로 정형화 하고 그것을 무턱대고 칭송하는 일입니다. 즉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가진 것을 다 팔아서 필요한 만큼 나누어 쓰는 그 제도 자체가 초대교회의 특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크게 잘못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는 이것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 곳곳에 퍼져있는 교회가 어떻게 이 과업을 수행하겠습니까? 저마다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교황청에 주고 교황청은 그것을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걸 본당 차원에서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의 제도상으로 돌아갈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초대교회의 진정한 특성을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살아있는 신앙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규모에서 그것을 가장 잘 살아가는 방식으로 우리가 이미 살펴본 형태를 선택한 것일 뿐입니다. 마치 물이 네모난 그릇에는 네모의 형태로 담기고 동그란 그릇에는 동그란 형태로 담기는 것과 같습니다. 초대교회는 자신들의 신앙을 제대로 살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함께 모아 공유하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그만큼 신앙이 뜨거웠고 서로가 가진 신앙의 내면을 굳게 신뢰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본당은 우리의 본당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신앙이 자리잡아야 마땅하고 동일한 신앙의 구체적 형태를 도시 본당에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도시 본당에서 이루어지는 복잡 다단한 신앙의 형태를 이리로 억지로 끌고 와서 살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가 지닌 신앙에 집중하고 그것을 구체화 하고 활성화 해야 합니다.
이 신앙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를 대상으로 합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손길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우리 인간은 바로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을 가장 실천적으로 구현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작용을 육신의 활동으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진정으로 지니게 되면 우리의 내면의 굳은 의지로 실천적인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활동이 세상을 변화시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앉아 있는 성당의 의자는 오늘 누군가가 '믿는 마음'으로 깨끗하게 닦아 놓은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신실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애쓰는 누군가가 자신의 자유시간을 희생해서 오전부터 나와서 자신이 앉지도 않을 의자를 그 자리에 앉게 될 누군가를 위해서 성실하게 닦아 놓은 것입니다. 이런 일은 일은 세상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에 합당한 비용이 제대로 지불되거나 최소한 누군가가 그러한 행위를 인정하고 들어높여 주어야 그런 일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믿는 이들은 하느님 때문에, 그분을 신뢰하는 마음 때문에 기꺼운 마음으로 그렇게 합니다.
의심하는 이는 이 믿음을 절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는 던져보지 않은 사람이고 그 결과를 체험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곳에 투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의심하는 이는 절대로 하느님의 약속에 투자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보상을 바래서 그 일을 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는 금은 결국 사라지고 말 대상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토마스야,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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