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빛과 어둠은 물리적인 것이라서 우리는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압니다. 즉,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집니다. 너무나 쉽고 간단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영적인 차원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 문제가 조금 복잡해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차원의 빛과 어둠은 그것을 실천적으로 움직여낼 수 있는 육체가 공존하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이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물리적인 차원의 빛은 그 본래의 성질에 순응합니다. 사실상 어둠이라는 것은 원래부터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둠은 빛이 없는 상태를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빛을 채워넣으면 어둠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물리적인 영역에서 어둠은 빛에 저항할 힘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혼의 빛과 어둠은 그것을 담고 있는 인간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 속에 감추어젼 빛과 어둠의 영역을 따라 움직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음 속 한가득 뜨거운 사랑을 품고 있어도 그것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게 마련이고 반대로 마음 속 한가득 어둠이 들어 있어도 마치 그것이 없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존중한다는 듯이 다가와서 교묘한 함정에 빠뜨리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사실상 시기와 증오, 원한, 악의와 같은 내적인 영역을 교묘히 감추고 예수님에게 다가와 그분을 무너뜨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정반대로 예수님의 내면에 깊이 감추어진 그들을 향한 진정한 의미의 사랑과 동정, 안타까움을 그들은 바라볼 수 없었습니다. 이처럼 영혼의 영역은 외적으로 철저히 가리워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때로 어둠이 빛을 삼켜 버립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자주 등장하듯이 세속의 권력은 사도들을 감방에 가두기를 밥먹듯이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권력으로 빛을 전하는 사도들을 어둠의 영역에 감추어 두려 했던 것입니다. 일찌기 세례자 요한도 헤로데의 감옥에 갇혀 있었고 우리 한국의 수많은 순교자들도 옥고를 겪어야만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성지가 바로 관덕정입니다. 그곳에 가면 우리 순교자들이 어떠한 괴로움을 겪었는지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은 어둠 속에 갇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죽고 무덤에 묻히셨지만,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운명을 하느님의 자녀들이 모두 동일하게 겪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해방될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 해방의 희망을 미리부터 선물받아 이미 해방된 이들입니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우리의 운명을 바라다볼 때에 그 일이 이미 일어났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진정한 아버지로 모시고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죽음의 그늘에서 해방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맑고 기쁘고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를 시기하고 공격하고 무너뜨리려 하겠지만 우리는 희망 속에서 기뻐하고 믿음 안에서 용기를 잃지 않고 참된 사랑을 실천하며 살 수 있습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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