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는 돌아섬을 의미합니다. 그릇된 길로 가는 여정을 돌이켜 바람직한 길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회개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회개는 하느님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에게 다가서는 길과 그분에게 멀어지는 길을 올바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있어 회개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측정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마치 정치판처럼 누군가는 하나의 의견을 주창하고 다른 이는 다른 의견을 주창하면서 서로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노라고 투덜대는 것을 회개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에 묘사된 대로 아이들이 장터에 모여 곡을 하는대도 울어주지 않고 피리를 부는 대도 춤을 추지 않는다고 아우성대는 꼴입니다.
감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대로 감을 좋아하면 되고 귤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대로 귤을 좋아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회개는 분명한 중심이 필요합니다. 즉, 회개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바른 방향'과 '위치'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내면은 방향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방향을 따라 살아갑니다. 탐욕과 쾌락을 쫓는 이는 그것을 자신의 궁극적 방향으로 설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가족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노름판에 뛰어들게 되는 것입니다. 또 권력을 뒤쫓는 이는 집안이 거덜이 나더라도 상관없이 선거판에 뛰어들어 권력을 쟁취하려고 합니다. 이런 혼탁한 방향을 바로 세우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참된 방향이 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 뿐이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그분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영원한 생명의 길,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바른 방향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로 회개할 수 있습니다. 돌이켜야 하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모르면 사람은 방황합니다. 그래서 사제도 수도자도 이 길을 모르면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흔히 사람들은 사제나 수도자가 환속을 하면 온가지 억측을 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하나 뿐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길에서 길을 잃어버린 이들입니다.
두번째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위치'입니다. 위치에는 가까움과 멂이 존재합니다. 방향은 하느님께 상정해 두고 그분에게 점점 더 멀어지는 이들이 있습니다. 신앙이 점점 더 뜨거워져야 하는데 미적지근해지다가 결국 꺼져 버리고 마는 이들이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최종적으로 세상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날이 우리의 위치를 점검해야 합니다. 우리가 과연 어디에 머물러 있는지, 오늘 하루는 하느님에게 다가서는 길이었는지 항상 점검해야 합니다. 그것을 '성찰'이라고 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하느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다가서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고민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 다가섬의 과정에 성령은 필수적입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오히려 우리를 자꾸만 하느님에게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간곡히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이 타락한 세대로부터 자신을 구원하십시오."
하지만 이 세상의 타락상을 내면적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결국 구원을 추구할 수 없게 됩니다. 더러운 배설물이 들어있는 상자라도 그 외면을 화려하게 꾸미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이들이 그것을 탐내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의 징표를 읽을 줄 알고 그 가운데에서 올바로 회개할 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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