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본다'고 할 때에 우리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 눈 앞에 있는 대상 그 자체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빛의 입자가 물체에 반사되어 우리 눈에 들어오는 것을 우리의 눈의 망막이 감지해서 두뇌에서 이미지를 재조합한 것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다는 것은 사실 순수한 물리적인 영역이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만진다고 할 때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만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만진다고 생각하는 물체의 원자가 사실상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과연 우리는 무언가를 제대로 만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손 끝에 느껴지는 감각으로 무언가를 만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피부에 감각이 잘못되면 무언가가 나를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하고 또 팔이 잘려나간 사람도 그 팔로 자신이 무언가를 만진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영혼의 감각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사실 순수한 물질적 세계가 아니라 우리에 의해서 가치가 부여된 세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더 귀하게 보이고 어떤 것들은 덜 귀하게 보입니다. 흔히 값비싼 물건은 '자본'이 신이 되어 있는 사회에서는 무척이나 존귀한 것으로 보이고 반대로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은 의미없는 것들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에게서 선물 받은 하찮은 반지를 소중하게 간직하는 사람은 그 반지의 실질적인 가격 때문에 그것을 간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물 해 준 이에 대한 애정과 사랑 때문에 그것이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눈을 뜨기 시작하면 신앙 안에서 값어치를 지니는 것들이 소중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눈 앞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보다 영혼을 장식하는 데에 더 가치를 두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소중하다 하시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 되고 세상이 중요하다 하는 것은 상대적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신앙생활은 바로 이 영적인 가치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치가 드높아지고 심지어는 그분이 못박힌 손과 발도 소중해지는 것입니다. 수난이 비로소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세상은 수난을 피하고 도망가야 할 대상으로 삼지만 믿는 이들은 수난을 부활로 나아가는 징검다리로 삼습니다. 그래서 믿는 이들은 시련 중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즐거워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을 겪으며 슬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1베드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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