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고통이 존재합니다. 가장 간단하게는 자신이 저지른 어둠에 상응하는 벌로써의 고통입니다. 즉, 술을 지나치게 마시는 사람이 도랑에 자빠져서 뼈가 부러지면 그것은 스스로가 자초한 고통입니다. 이는 고통의 근거가 되는 자신의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고 그렇게 할 때에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고통입니다. 탐욕스런 사람이 사기꾼에게 걸려든다든지, 색욕이 가득한 사람이 간통의 유혹에 걸려 든다든지 하는 일들이 모두 같은 성격의 고통이 됩니다. 이는 멈추어야 하고 그쳐야 하는 고통입니다.
일상의 영역 안에서 존재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자연 재해의 고통이나 생존을 위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수고와 같은 고통입니다. 이러한 종류의 고통은 우리의 능력을 끌어올리는 데에 필요한 고통이고 나아가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데에 필요한 고통입니다. 아무도 아쉬운 게 없다면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유도 없어지니까요. 때로는 누군가 자신의 탓 없이 불행을 겪게 되고 다른 누군가는 그런 이들을 기꺼이 도와 주어야 합니다. 재해로 집을 잃은 이에게 살 곳을 마련해 준다던지 질병으로 힘들어하는 이를 돌보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데 필요한 일입니다.
나아가 '선을 행하는데도 겪게 되는 고난'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특화된 고통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섞여 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하느님께로 이끌어가야 하는 이들이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야 하는 이들입니다. 그래서 빛을 비추면 어둠이 놀라게 됩니다. 특히나 영혼의 어둠은 그의 현실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어서 어둠은 흔히 힘을 갖고 있는데 그 어둠에 귀속된 사람들은 빛의 자녀들을 증오하고 싫어하게 되고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을 괴롭히고 그들이 하는 일을 가로막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따르는 데에는 바로 그분이 이 길을 먼저 걸어 가시면서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름아닌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겪어야 하는 운명을 지닌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저지르지도 않았고 그의 입에는 아무런 거짓도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분을 폭행했고 모욕했습니다. 그분은 모역을 당하시면서도 모욕으로 갚지 않으시고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시고,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당신 자신을 맡기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을 아는 이들이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이들입니다. 그 가운데 성소자들은 그분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아 그 사명을 자신의 고유한 직분으로 수행하기 위한 이들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자신의 소명을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세상에 맞서 나갈때 세상은 비로소 빛을 바라보게 됩니다.
오늘날 성소자들의 감소가 눈에 띄게 증가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진단이 나오겠지만 저는 이 현상의 근본 안에 바로 신앙의 핵심에 대한 흐려짐이 존재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선을 행해서 칭찬받고자 하는 이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고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 걷는 이들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압니다. 그것은 구원을 향한 고난의 길입니다. 모쪼록 이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늘어나고 그 길에서 감동받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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